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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고택순례-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 (淸道 雲岡故宅, 萬和亭)

단아한 품격으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운강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06호 ⑦

2017년 10월 21일(토) 15:04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고헌산 골짜기를 흘러온 동창천의 안개에 부화된 만화정의 아침은 서럽게도 아름답다. 뼈마디 관절마다 시간의 상처를 안고 체화(體化)하여 툭툭 불거지고 이끼조차 덮인 채, 수문장 왕버드나무는 만화정의 하루를 연다.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를 제치고 미어캣처럼 일어난 맥문동이 보라색 고개를 들고 눈비빔하는 시간, 왕버드나무 뒤에서 외투를 길게 펼친 어린왕자가 불쑥 나타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린 왕자는 요청하였다. “나를 길들여줘.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알게 되겠지. 만일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온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거야"
그러나 어린 왕자마저, 두고 온 그의 장미를 책임지기 위해 돌아갔듯 책임질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은 속속 자기 별로 돌아가고 종단에는 다시 동창천과 만화정, 왕버드나무와 맥문동만 남을 것이다.
운강고택과 만화정이 위치한 신지리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사람의 마을로서 역사가 깊다. 이곳에 조선 중기의 학자 소요당 박하담(朴河淡, 1479:성종10~1560:명종15)이 입향해 터를 잡으면서 밀양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소요당의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여러 관직으로 그를 불렀으나 소요당은 모두 응하지 않고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운강고택은 현 소유자의 6대조 성경당 박정주(朴廷周)(1789∼1850)가 분가하면서 1809년에 살림집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824년(순조 24) 운강 박시묵이 중수하면서 운강고택이라고 불리게 된다. 운강 박시묵은 소요당 박하담의 12대손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에 오른 인물이다. 이후 1905년에 운강의 증손 박순병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화정은 운강고택에 딸린 정자로 운강고택에서 도로를 건너 동창천쪽으로 7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1856년 운강이 수학(修學)과 강학(講學)을 위해 지었다.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 격려차 내려와 잠시 머문 곳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대통령의 품격에 걸맞게 건물과 그 주변 풍광이 운치가 있다. 이 정자를 건립할 당시에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려면 배를 타야 했다고 한다. 그 옛날 동창천 높은 절벽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고고히 굽어보던 아름다운 정자는 선비들만의 특권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시멘트 다리가 놓여 편리해졌을지언정 그 품격은 많이 훼손된 느낌이다. 만화정이라는 당호는 지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화정 앞 들녘을 ‘만화평(萬花平)’이라 불렀는데 성리학자답게 꽃 화(花)자를 화할 화(和)자로 바꾸어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하였다. 왕버드나무와 그를 둘러싼 맥문동 꽃밭을 정원처럼 앞에 두고 단정하게 기와 올린 돌담을 양 옆에 거느린 만화정의 대문에는 ‘유도문(由道門)’이라는 편액이 맞배지붕의 처마 밑에 걸려있다. 편액 아래로 빼꼼 보이는 ‘유도문 중수기(由道門 重修記)’는 만화정 대문을 ‘유도문’이라 이름붙인 이가 운강의 아들 박재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유도문 편액의 테두리에는 아직 푸르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가 남아있다. 처음엔 굳건해 보이는 자물쇠로 대문이 잠겨있어서 ‘멀리서 온 보람도 없이 못 보면 어쩌나’ 잠시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운 좋게도 건물을 관리하는 후손을 만나 잠겨있던 만화정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화정은 정자라고는 하지만 관리를 위해 사용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행랑채와 고방채를 따로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커서 별장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대문에서부터 아기자기 꾸며진 화단 사잇길 경사로를 밟아 이어지는 8단 높이의 계단을 오르면 시원하게 열린 대청마루를 통해 후원이 보이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을 들였다. 건물의 측면 기단에는 석가산을 꾸밀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암석이 경사진 암반지형을 그대로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누마루는 바깥으로 면한 3면에 기둥 밖으로 좁은 마루를 둘러 깔아 바닥을 확장한 헌함을 돌리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아기자기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누마루에 올라 잠시 앉아보니 저마다 화려하게 꾸민 25점이나 되는 편액이 빙 둘러서서 내려다본다. 천장 곳곳 섬세하게 조각된 용과 봉황, 연꽃 문양은 주인장의 꿈과 안목에서 우러난 정성을 보여준다. 그 면면이 당대 내로라하던 이곳 방문객들의 품격을 대변하고 있어서 그 시절 같았으면 아녀자가 이곳에 앉을 수나 있었을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누마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광이 산수화 걸린 듯 아름다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던 ‘선유후부가설화(仙遊朽斧柯說話)’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정자에 오래 머물며 요리보고 조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오랜 시간의 흔적들과 같이 하고 싶었으나 철든 생각의 바쁜 재촉에 만화정을 나와 운강고택으로 걸음을 옮긴다.
운강고택은 만화정과는 달리 골목을 두 번 꺾어 들어가는 막다른 곳에 대문을 세웠다. 외부의 액을 막고 복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골목 깊숙이 자리한 운강고택은 농경사회의 조심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이 정답게 안내하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솟을대문처마 아래 ‘운강고택’ 당호가 보이고 빗살격자광창을 설치하여 가볍게 멋을 낸 대문채가 이채롭다.
운강고택은 사랑채 공간과 안채 공간이 각각 ‘ㅁ’자 형태로 배치된 네 건물로 이루어져 두 개의 ‘ㅁ’자가 서로 모서리각에서 만난 형태가 주를 이루고 중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위치해 있다. 사랑채 공간에는 마당을 중심으로 대문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가 있고 안채 공간은 큰 사랑채에서 담으로 이어진 중문채, 안채, 행랑채와 큰 사랑채 뒷방에서 이어지는 고방채가 있다. 운강고택 9채의 건물 중 안채 마당으로 꺾어진 ‘ㅗ’자 형태의 큰 사랑채 이외의 모든 건물은 ‘ㅡ’자 형으로 마주보고 있다.
북향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동향으로 놓인 사랑채가 좌측으로 보이고 대문채 끝에 사랑채 전용 측간을 두었는데 문 위에 매화꽃을 조각하여 길게 통풍창을 설치한 모습이 흥미롭다. 측간문 위에 매화꽃을 장식한 것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였던 변기, ‘매화틀’을 염두에 둔 주인장의 재치와 해학인 듯하다.
대문채의 오른 편은 사랑채에서 마주보이는 5칸의 고방채이다. 네 칸을 곳간으로 사용하였고 좌측 끝 칸은 마구간이다. 말을 타고 드나들었을 주인의 호방함과 그 위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사랑채는 집안의 남자어른이 기거하며 손님을 맞던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뒷사랑방이 안채의 맞은편 고방채와 협문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ㅗ’자를 구성한다. 협문은 안채에서 사랑채 앞마당을 거치지 않고 대문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한 동선을 이루어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내외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아녀자들의 움직임을 배려한 문이다.
사랑채를 정면에서 보면 민가의 기단으로는 보기 드물게 잘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두 단 기단을 쌓고 네모 반듯한 섬돌과 사다리꼴로 다듬은 주춧돌 위에 방형 기둥을 얹은 모습이 깔끔하고 반듯하여 절제와 균형의 미를 전해준다. 대문채 쪽으로 두 칸에 대청을 들이고 가운데 두 칸은 사랑방을 놓았다. 중문채 쪽으로는 방 두 개를 세로로 놓아 안채 마당으로 통하도록 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건물로써 연결하였다.
큰사랑채와 중문채는 아름다운 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커다란 그림 액자가 걸린 듯 인상적이다. 담장의 밑부분은 흰 회벽의 여백을 충분히 주어 돌의 문양이 아기자기 드러나도록 하였고 거북등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를 위 아래로 장식한 중앙에 별꽃모양과 길할길(吉)자를 번갈아 넣어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예쁘게 표현하였다.
큰 사랑채와 수평으로 이어지는 중문채는 3칸을 곳간으로 사용하고 끝 칸에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을 설치하였다.
중사랑채는 학당처럼 사용된 공간이다. 사랑채와 ‘ㄱ’자를 이루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대문채에서 보면 정면으로 마주 보인다. 사랑채보다 반단을 낮춘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올렸다. 네 칸에 모두 같은 모양과 크기의 띠살무늬 2분합문을 달고 양쪽 끝 두 칸 마루 밑을 막아 두 개씩 둥근 통풍구를 설치하여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 조화롭다. 중사랑채의 동쪽 측면 벽이 나무로 된 판벽인 점이 특징적인데 서고(書庫)로 사용된 공간이다 보니 통풍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중문채 서쪽 벽에서 이어지는 담장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고 그 맞은 편 사당으로 들어가는 협문이 있다. 사당은 들어가는 문에서부터 소로와 공포로 정성을 들인 흔적이 뚜렷하다. 담장을 두르고 별도의 공간으로 나누어 조상에 대한 예의와 삼감을 표현한 사당은 네 개의 두리기둥을 세우고 소로를 넣은 소로수장집으로 맞배지붕은 얹어 조상에 대한 후손의 지성을 다한 공경의 마음을 담은 엄숙함이 느껴진다.
사당문 맞은편 중문을 지나면 넓은 안마당이 시원하게 트인 안채 공간이다. 안채는 삼단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을 쌓아 기단을 높이고 덤벙주초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는데 섬돌대신 기둥과 기둥사이에 정교하게 나무로 디딤판을 달아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정면 7칸 측면 2.5칸의 건물로 두 칸에 부엌을 배치하고 가운데 두 칸 씩 방과 대청을 두었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수평으로 낮게 설치된 굴뚝인 두 개의 ‘가랫굴’이 인상적이다. 낮게 깔리는 연기로 해충을 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밥을 굶는 이웃을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채 뒤로는 널찍한 후원에 칠성바위가 있어 이른 새벽 정화수 앞에 두 손 모아 가족들의 무병장수와 소원성취를 빌었던 할머니의 모습이 투영된다.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부엌, 방, 대청, 곳간, 방앗간이 배치되어 있다. 방앗간에는 어제도 사용했고 내일도 사용할 것 같은 디딜방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안채의 고방채는 두 칸의 뒷사랑방과 같은 지붕아래 있는데 사랑채는 흰색 회벽으로 마감하고 고방채는 나무 판벽으로 막아 한 지붕아래 있지만 상하의 질서가 있는 두 개의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 강조한 점이 흥미롭다. 사랑방에서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벽의 상단에 설치된 다락의 넉살무늬 광창은 반듯반듯 나무로 구분하여 모범생처럼 지루할 뻔한 사각형의 벽에 장식처럼 이채로운 아름다움을 준다.
제복을 입은 듯 군더더기 없이 반듯한 깔끔함을 기본으로 이곳저곳에 장식적 꾸밈을 주어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표현한 운강고택은 단아하고 품격있게 꾸민 미인을 마주쳤을 때처럼 눈호강의 행복감을 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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