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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고택순례-영동 소석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32호 ⑧

양강천과 영동천이 합류하는 넓은 평지에 소박하고 간결한 소석고택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로6길 26

2017년 10월 28일(토) 14:44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마을로 접어든 길 끝 어딘가에 소석고택이 있으련만 예측할 수 없도록 구부러진 골목은 차에서 내려 걷기를 권하였다. 차를 고집한다면 못갈 길도 아니었지만 햇빛과 바람에 어깨를 내어주고 담장에 별처럼 내려앉은 노란 호박꽃과 눈 맞추며 나긋나긋 걸으니 친구 집 대문 앞에서 “친구야~ 놀자~”크게 소리쳐 친구 찾던 그 시절의 아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돌이켜보니, 대빗자루로 자기 집 앞 골목길을 쓰는 것이 미덕이었던 때에는 집과 집 사이를 흐르던 골목을 따라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 친구들의 집과 만화방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어딘가에 숨어있었고 골목을 빠져나와야 비로소 점방이 보이고 학교가 보였다. 운동장의 아이들은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뒤에서야 흙 묻은 바지를 털다가 문득 허기를 느끼고 빠르게 골목으로 사라졌다. 한손에 든 가방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한쪽 어깨를 삐딱하게 올리고 걷던 단발머리 시절에도 골목과 큰길을 번갈아가며 한 시간정도는 예사로이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골목길들이 찻길로 바뀌면서 지금은 백 여 미터만 움직이려 해도 자동차가 없으면 답답해진다. ‘인 타임(In time)'의 속도전을 빌미로 조급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자동차가 필수품이 된 현대인들의 삶에서 이제 ‘골목’이라는 용어는 고어사전에 더 어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영동에 들어서니 릴케의 「가을 날」처럼 가을볕의 마지막 단맛을 욕심껏 품은 포도며 사과가 ‘과일의 나라’ 영동을 실감나게 한다. 금강의 상류지역으로 전북 무주, 경북 김천과 삼도봉(三道峰)에서 만나는 영동은 내륙에 위치하여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지만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아 예로부터 사과며 포도 등 과일이 맛있기로 이름이 있었다.
소석고택이 위치한 심천면은 양강천과 송천이 합류하여 강같이 큰 내를 이루었기 때문에 ‘심천(深川)’ 또는 ‘지프내’라 불렸고, 초강리는 마을 앞 갈대밭에 황새가 많이 날아들었다 하여 ‘황새마을’이라 불리다가, 양강천과 영동천이 만나 이루어진 넓은 강변에 풀이 많이 나는 특징 때문에 후에는 ‘초강’이라고 불려졌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소석고택은 넓은 평지에 형성된 마을 중심에 앉아있다.
소석고택은 1885년(고종 22년) 송병필(1854~1903)이 지은 집으로 소석은 그의 호이다.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영동 송재문 가옥(永同 宋在文 家屋)으로 등록되었으나 2007년에 고택을 지은 송병필의 호를 따라 ‘영동 소석고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세기 무렵 초강리는 은진 송씨의 집성촌이었는데 누가 언제부터 초강리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후손으로 은진 송씨(恩津宋氏) 문정공파(文正公派) 23세손 소석은 5천석 농사를 지은 부농이었다. 영동읍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된 ‘규당 고택’ 역시 이 집안의 고택으로 소석의 장자 송복헌(1875~1948)의 집이다. 규당고택 안채의 망와에 ‘乙酉三月’(1885년)과 ‘丙戌三月’(1886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석고택과 규당고택이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석고택 앞에 도착하였을 때 대문은 잠겨있었으나 다행스럽게 관리인의 번호가 안내되어 있어 전화를 하였더니 같은 동네에 사는 듯 지체 없이 달려오셨다. 하지만 최근에 고택의 관리가 다른 단체로 넘겨져 이제는 자신이 관리인이 아니라고 하시는 말씀에 푸념이 섞여 있다. 오랫동안 정성껏 관리를 하였는데 갑자기 권리를 빼앗기니 황당한 마음인 듯하였다.
고택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관리가 되어 비교적 깨끗하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고택은 내부를 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데 여기는 비어있는 상태여서 부담 없이 내부를 감상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고택은 1885년 지어질 당시만 해도 사랑채와 안채, 중행랑채, 고방채 등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는데 1920년대에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던 중행랑채와 고방채가 헐리고 그 후로도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대문과 담을 비롯하여 고방채와 측간 등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새로 지어졌지만 사랑채와 안채는 비교적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문간 가까이 맞배지붕을 올린 고방채가 보이고 안채로 가는 길목 오른편으로 초가지붕을 얹은 고방채가 하나 더 있다. 초가를 얹은 고방채와 사랑채 뒤편의 측간은 모두 묵은 짚은 걷어내지 않고 이엉을 얹었는지 수년 동안 쌓인 지붕이 심한 가분수가 되어 보기에 민망한 감이 있다. 또한 사랑채를 조근 조근 살피다보면 누마루 맞은 편 방 옆으로 지금은 용도를 잃은 한 칸 크기의 대문이 붙어있는데 대문이 담장과 멀리 떨어진데다 사랑마루 앞이 대문 앞이 되는 형국이어서 어리둥절하다. 사랑채 서쪽 날개채에 붙은 이 대문은 아마도 사랑채 서쪽에 위치하였던 다른 건물과 연결되는 중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렇듯 집 앞 도로의 변화에 따라 대문과 담장이 새로 만들어지다 보니 애초의 모습을 잃은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담장 가까이 사랑채가 앞서있고 예전에는 중행랑채가 안채와 사이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담장의 일부만이 남아 내외 벽처럼 서 있다. 넓은 중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수평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내외간에 거리를 두고 걸었던 옛날 부부의 바깥나들이 모습처럼 느껴진다.
사랑채는 살짝 경사진 터에 세워졌다. 보통 경사진 곳을 높여 수평으로 터를 고르고 집을 짓는 것이 훨씬 쉬운 방법일 것인데 기단과 주초, 기둥의 높이를 조절하여 건물의 수평을 잡은 섬세함이 놀랍다. 그렇다보니 누마루 아래 기둥은 마치 누하주처럼 마루 밑 길이가 길다. 정면 6칸의 사랑채는 앞뒤로 양쪽 날개를 내민 ‘H'자 구조인데 누마루가 있는 동쪽 지붕은 팔작지붕을 얹었고 반대편 서쪽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꾸민 점이 독특하다. 누마루는 뒤쪽으로 방을 두고 시원하게 열린 삼면에 청판이 없는 난간을 둘러놓아 소박미와 간결미가 있으나 누마루 서쪽면으로 머름대와 문설주가 남아있어서 옛 모습을 궁금하게 한다. 동쪽 날개채는 앞면으로 누마루가 나오고 건넌방 두 개를 나란히 배치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툇마루 끝으로 반칸을 빼어 아궁이를 배치하고 옆으로 수납공간을 배치하여 신발을 벗지 않고도 물건을 꺼낼 수 있도록 만든 점이 흥미롭다.
툇마루를 앞에 둔 사랑채의 동쪽 측면은 황토벽면을 같은 크기와 비율로 깔끔하게 구분하고 머름위로 2분합 띠살창을 쌍둥이처럼 달았는데 그 위로 중앙을 맞추어 지붕의 합각면을 보이게 설치하였다. 합각면에는 흰색 회벽에 기와로 수평의 물결무늬를 정성스레 넣었다. 대문간에서 마주보면 정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조형미가 뛰어나다.
사랑채 중앙에는 가운데 두 칸을 대청으로 두고 양쪽으로 방을 배치하였다. 4분합 띠살문으로 들문을 설치한 대청은 방과 대청 사이에도 4분합으로 들문을 설치하여 상황에 따라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실용성과 더불어 문 중앙에 불발기를 넣고 문 위로는 두 부분으로 구분된 빗살격자창을 설치하여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주었다. 대청마루 서쪽으로는 방 두 개를 서로 분리하여 구분하였다. 서북쪽으로 반 칸을 늘려 배치한 방은 전면에 드러난 방과 복도식으로 이어져있고 은밀하게 다락을 넣어 일제 강점기에 마을 사람들이 징병을 피해 이 곳에 숨었다고 한다. 방 뒤로는 이분합으로 띠살문을 설치하고 툇마루를 놓아 측간으로 가는 동선을 줄였음을 알 수 있다. 마루에 면한 창들은 모두 머름대 위에 미서기창을 달고 이분합 띠살창으로 덧문을 설치하여 내부공간을 보호하였다.
굴뚝은 따로 높이 세우지 않고 가랫굴로 마루아래 숨겨 밥짓는 연기가 높이 오르지 않도록 한 배려심이 엿보인다.
반쯤 가린 담장과 문지기처럼 서 있는 감나무 너머로 넓은 터를 사이에 두고 ‘ㅡ’자형의 안채가 있다. 돌의 크기에 따라 한단이나 두단으로 자연스럽게 쌓아 높이를 맞춘 기단 위로 덤벙주초를 놓고 방형 기둥을 당당하게 세워 팔작지붕을 올렸다. 정면 6칸에 측면은 한 칸인데 전후퇴를 두어 실제로는 두 칸의 크기이다. 서쪽부터 차례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 건넌방을 배치하였고 동쪽 전면에 두 개의 솥을 걸은 아궁이를 설치한 것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 위치는 사랑채 동쪽 뒷면에 설치된 아궁이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곳으로 동선을 최소화한 실용적인 지혜가 엿보인다. 보통 이러한 아궁이는 난방을 겸하여 겨울철에 식구들이 씻을 수 있는 물을 덥히거나 쇠죽을 끓일 때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가까이에 외양간을 두었음직도 하다.
부엌은 문 앞 반 칸을 토방으로 두어 비를 맞지 않도록 땔감을 쌓았거나 식재료를 다듬었을 것이다. 부뚜막 위에 벽장을 설치한 것은 대부분의 한옥 부엌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나 서쪽 지붕 아래로 반 칸을 더 내어 살강과 통기구멍을 설치한 것은 특징적이다. 살강 위에 깨끗하게 닦은 놋쇠그릇이나 하얀 사기그릇을 서로 엇갈리게 쌓아 엎어놓았던 할머니의 부엌이 생각난다.
방 앞뒤로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실내공간에 자유로움을 주었고 가운데 두 칸의 널찍한 대청은 전면에 문을 두지 않고 툭 터져 있어 기후가 춥지 않은 지방의 특성을 보여준다. 대청 뒷면에 판장문을 설치하는 북부 지방의 한옥과는 달리 머름위에 2분합 띠살창을 설치하여 시원스러움을 강조하였다. 대청과 윗방 사이에도 벽이 없이 전면에 불발기 분합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넌방은 아궁이 쪽으로 쪽문을 내어 소통을 도모하였으며 위쪽으로 다락을 두고 통풍을 위해 넉살무늬창을 설치하여 오밀조밀한 구성에 아기자기함을 더하였다.
안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팔작지붕의 합각면이다.
기와조각으로 쌍희 희(囍)자를 장식하였는데 그 모양이 세련되거나 정교하진 않지만 소박한 얼굴로 웃고 있는 두 부부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하다.
집안에 항상 기쁜 일만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의 기원일 것이다.
소석고택과 규당고택은 같은 집안의 고택으로서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터가 공터처럼 비어 그 옛날 이 넓은 터가 어떠한 용도로 쓰였을까 궁금증이 인다. 꽃과 채소를 키우고 곡식을 말리고 사람이 북적댔을 그 공간이 지금은 한없이 넓어 주인을 잃은 듯 휑뎅그렁하다. 이렇게 남겨진 고택의 고적함은 충분히 사랑받았던 옛 추억을 안고 순리에 의탁한 관조일까? 떠나버린 주인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쓸쓸한 체념일까? 답을 찾지 못한 발길에 떨어지는 감잎 소리만 유난히 크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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