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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권보전지역 탐방⑯-고창지방 동학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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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안민·반봉건·반외세를 외친 동학농민혁명
4천여명이 무장기포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장시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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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09일(목) 14:49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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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음면 구수네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기포지 기념탑 | ⓒ (주)고창신문 | |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고종 31) 3월 20일(음력) 봉건 정부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하늘이다”는 사상과 반봉건·반외세척결을 주창하며 동학도와 농민이 봉기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역사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꿔 놓은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민족 해방운동사 또는 민중운동사의 시발점이었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조선 후기 중세적인 봉건 지배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19세기 후반 27회의 빈번한 농민 중심의 민란 발생, 1864년 동학 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죄를 벗기고 자유로운 종교 활동보장을 위해 교조 신원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다.
동학의 영도자인 전봉준 장군은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소년기까지 고창에서 지내다 서당을 운영하던 부친 전창욱을 따라 정읍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으며, 고부에서 동학 접주를 하면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항거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2년 고부에서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해서 만석보 개수에 따른 수세를 징수하고, 아버지 공덕비 건립과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를 씌워 기회가 있는 데로 각가지 명목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만석보는 농민들을 동원해서 만들고, 농민들에게 받는 수세가 과중해 경감을 청구하기 일쑤였는데 만석보 밑에 필요치도 않은 만신보를 쌓고 농민들에게 고율의 수세를 징수하여 700여섬을 착복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1893년 11월 익산군수로 밀려 났던 조병갑이 임지에는 부임조차 하지 않고 유임시키고,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로 다시 오자 다음날인 1월 10일 동학접주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3장두을 중심으로 고부의 말목장터에 많은 농민들이 모인 다음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조병갑은 도망가고, 무기고를 부수었으며, 재무장 후 억울하게 갇힌 사람을 풀어주었다. 또한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수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질이 나쁜 아전들을 처벌하였으며 만신보를 헐어 냈다.
조정에서도 조병갑을 체포해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 박원명을 임명하였으며 책임을 묻지 않고 평화롭게 해결한다고 약속으로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약속과 다르게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가장 안전한 고창으로 들어와서 남부지방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인 손화중 접주와 김개남 접주가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1894년 3월 20일(음력) 4,000여명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하고 손화중, 김개남을 영도장으로 임명하여 창의문을 낭독하고 외세 배척과 탐관오리 척결, 보국안민을 외치며 기포하게 되었다.
이들은 행동목표인 4대 명의와 행동수칙인 12개조 기율을 발표하고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혁명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4대 명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말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였으며, 12개조 기율은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곤궁하는 자는 구제한다,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도주하는 자는 쪽지 않는다, 굶주린 자는 먹인다,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빈한한 자는 진홀한다.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병든자에게는 약을 준다, 불효자는 죽인다”였다.
고창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활동 무대와 다양한 유적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지금의 고창군 공음면 구수네마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기념탑이 서 있는 곳으로 이마을에 오래 살았던 송문수 집에서 전봉준, 손화중, 송문수, 정백현, 김성칠 등이 모여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해서 1894년 3월 20일 기포해서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
□ 전봉준 장군 생가
1855년 12월 3일(음력) 고창읍 죽림리 딩촌마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철로이고 녹두는 체격이 작으면서 똘똘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13세때 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다 이사하였으며, 도산천에 갈매기가 노는 것을 보면서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 한편이 전해지고 있다.
□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
이 곳 불상의 배꼽부분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비기가 들어 있다 하여 1892년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중 한사람인 손화중포 도인들이 꺼내서 보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손화중 도소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라감사 이서구가 사람을 시켜 비기를 꺼내려다 괴성벽력이 쳐서 꺼내보지 못하고 다시 봉했다는 애기가 전해지고 있다.
□ 무장현 관아와 읍성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할 현이었으나 피해가 없었던 곳이다. 1894년 4월 초 1만여 명의 농학농민군들이 무혈입성해서 감옥에 있던 40여명의 농학농민군을 석방하였으며, 이 곳과 여시뫼봉에서 3일간 휴식과 훈련을 하였으며, 이들은 장성 황룡강에서 경군과 일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곳에서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곳이다.
□ 무장 여시뫼봉
152m의 야트막한 산으로 왕재산 또는 여시뫼봉으로 불러지고 있다. 이 곳은 구, 신왕초등학교 뒷산으로 정상에서 보면 사방이 활 트여 있으며, 농학농민군들이 무장현에 무혈입성 하였을때 일부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전열을 재정비하고 세를 규합하며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다.
□ 손화중 도소
고창군 성송면 괴치 2길 15에 있었으며, 손화중은 정읍에서 태어났고 부안에서 포교를 시작한 후 정읍을 거쳐 무장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활동적인 공간이면서 많은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는 이곳으로 도소를 옮겼다고 한다. 손화중 대접주는 무장, 정읍, 고창, 부안은 물론 광주, 나주, 장성, 담양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 손화중 피체지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지 부안면 인촌로 322-65에 있는 고잔마을 이씨 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중, 동생, 조카, 처남들이 처형당하고 전봉준, 김개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재실지기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아라”고 한 뒤 잡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 고창읍성
동학농민군들이 당시 정읍, 흥덕을 거쳐 고창에 입성하였다. 점령 후 옥에 있던 동학도와 죄수를 풀어주고, 읍성앞에 살며 부정축재를 일삼던 은대정의 집을 불태웠다.
□ 흥성동헌
흥덕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였던 곳으로 적극적 사회개혁이 추진되었다. 동학농민혁명당시 차치구는 고부봉기에 참여하고 전주입성에 앞장섰다. 차치구는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입암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지내다 흥덕관아로 끌려가 동학농민군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재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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