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성내면 양계리, 독립투쟁과 후학양성의 본거지
|
|
흥동장학당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 전달
|
|
2018년 03월 28일(수) 00:27 [(주)고창신문] 
|
|
|
| 
| | ↑↑ 상해임시정부 독립군 자금모금과 후학양성을 하였던 흥동장학당 | ⓒ (주)고창신문 | | 성내면은 고창군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읍시·부안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대부분 지역이 낮은 구릉지대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흥덕현의 일동면(一東面), 이동면(二東面) 지역이다. 1895년 전주부의 흥덕군으로 1896년 전라북도 흥덕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일동면과 이동면을 중심으로 이서면·고부군 성포면·서부면 등의 일부 동리를 합쳐 고창군 성내면이 되었다. 성내면이라는 명칭은 신성리의 칠성동(七星洞)과 양계리의 내퇴(톳날)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합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양계리(陽桂里)는 행정구역 개편시 석양리(石陽里)와 계동리(桂洞里)에서 양(陽)자와 계(桂)자를 따서 양계라 하였다고 한다.
양계리는 성내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기·운산·석양·내토 등 4개의 행정분리와 시기·운산·석양·계동·샛터·내퇴 등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산계는 호남의 대동백인 노력산맥의 밤고개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발달하여 산림리를 지나 계동에서 두갈래로 갈라진다. 계동에서 북서쪽으로 흘러간 산줄기는 내퇴마을을 감싸고 멈추었으며, 계동에서 갈라진 한 줄기는 북서쪽으로 가서 운산에서 멈춘다. 이 산 줄기는 북서쪽으로 계속 가다가 기맥의 끝자락인 흥동장학당에서 멈춘다.
시기(市基)마을은 성내면 소재지 마을로 일제강점기인 1945년까지 5일장이 있었다고 하며,. 운등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운산(雲山)마을은 성내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00m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산에는 광활한 평야에 구름이 자주 낀다하여 뒷산을 ‘구름동산’이라 하는 구전과 함께 마을 이름을 운산이라 하였다 한다.
석양(石陽)마을은 조선 중기인 1630년대에 전주이씨가 입향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면소재지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을은 둘레 6m, 높이 1.6m의 바위가 해가 떠오를 때 빛이 난다해서 석양이라고 불렀다 한다.
내토(內兎)마을은 조선 중기 전주이씨 경녕군파가 입행하면서 생긴 마을로 소재지 동쪽 700m 거리에 있다. 마을의 형국이 토끼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내토라 했는데 토진(兎津)-톳날-안톳날-내토(內兎)로 바뀌었다.
양계리는 성내면의 일번지로 면단위 행정기관과 학교, 단체들이 운집한 곳이다. 성내면 주민복지향상에 주력하고 있는 성내면사무소, 성내치안센터는 1928년
9월 25일 성내주재소로 출범하여, 1991년 6월 11일 성내지서로, 2003년 7월 1일 흥덕파출소 성내치안센터로 변경되었다.
성내우체국은 1964년 9월 25일 개국하여 현청사에 1991년 6월 9일 이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덕농협성내지점은 당초 성내농협으로 1965년 7월 24일 설치하였으나, 1973년 11월 28맇 성내단위농협으로 개칭하였다. 2005년 12월 9일 흥덕, 신림, 성내농협을 통합하여 흥덕농협이 되었으며, 성내농협은 흥덕농협성내지점으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내초등학교는 1924년 4월 21일 개교하여 94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22년 일제강점기에 흥동장학회와 이휴열씨가 주동이 되어 사립 성내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성내국민학교에 편입하였다. 현재는 성내 용교초등학교와 성내 북초등학교를 통합하여 성내초등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양계리에는 성내청소년문화의 집, 성내면농업인상담소, 하늘땅지역아동센터, 성내면노인회관, 성내교회, 노인복지센터 등이 소재하고 있다.
양계리에는 군민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자긍심을 살린 곳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속 문화유적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흥동장학당은 흥덕농협 성내지점 앞인 시기마을의 운등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은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31년에 창건된 흥동장학당은 일제강점기에 근촌 백관수, 백낙윤 등 96인의 장학회원들이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군 자금모금과 후학양성을 위해 지었던 건물로, 한일 병합이 되자 성내면 출신인 근촌 백관수 선생은 부안 내소사에서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기밀조직 발기인회를 갖고 성내면 82명, 서울 등 14명으로 전국적으로 96명의 회원을 모집한 후 홍동장학회를 조직하였다.
| 
| | ↑↑ 1919년 을미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한 대한독립운동사적비 | ⓒ (주)고창신문 | |
근촌선생은 일본에서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 자료를 홍동장학회에 보내 고창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게 하였으며, 장학당을 지은 후 상해임시정부 호남지구 군자금 모집본부를 이곳에 설치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한 곳이다.
해방 후 홍동장학회원중 건국포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하였으며, 장학계원이 출자한 자금으로 후학양성을 위하여 성내보통학교와 고창고보설립에 후원하는 등 민족교육 기반조성과 반일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산실이다.
또한 성내초등학교 뒷산에는 스승의 사표인 한상신 교사의 묘소가 있다. 한상신 교사는 1940년 6월 10일 옥구군 옥구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1958년 3월 20일 군산사법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5월 20일 고창군 상하초등학교에서 교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1964년 9월 1일 성내면 용교초등학교에 부임해서 4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때만 해도 워낙 시골이라 제자들이 호남선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해서 그해 10월 17일 학생 40명을 인솔하고 방장산으로 가을소품을 갔는데 도중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제자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방장산을 계속 오르다가 앞서가던 제자가 딛은 바위가 굴러 뒤따르는 제자들을 덮치려는 순간 온몸으로 바위를 막아 제자는 구할수 있었으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 산을 내려왔는데 제자들이 이상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1978년 4월 18일 전 교육자들이 성금을 모아 고창읍 새마을공원에 사혼불멸(師魂不滅) 추모탑을 세웠으며, 1984년 10월 16일에 성내면 용교리 앞산에 있던 묘소를 양계리로 묘지를 이장하였다. 묘소에는 군산사범학교 동문회에서 세운 기적비와 용교초등학교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으며, 한상신 교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한상신 선생 추모 종합예능경연대회를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축천비(祝泉碑)는 운산마을에 소재하고 있으며, 김해김씨인 사충당 김태정(金台鼎)은 6세부터 학문을 배워 학문이 능하였을 뿐 아니라 15세에 복시과에 합격하였다. 공은 효로 부모를 섬기었고 부모가 돌아 가신후 3년상은 물론 시묘살이를 하면서 먼산에 있는 약수터의 물을 길러다 사용하였는데 하루는 뭉을 길으려 가고 있는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샘이 생겨났다. 이 생을 축천(祝泉)이라하고 축천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또한 구, 성내면사무소 부근에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라앉혀 드린 영험이 있는 샘이라는 영천(靈泉)이 있다. 이샘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삼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괴팍하고 청춘과부가 된 어머니를 위해 정성을 다하여 효도를 다해도 부족해 하는 어머니를 위해 남자를 만나게 해 드렸으나, 견우직녀처럼 자주 만날 수 없었고 그리움과 적적함을 달래 드리려고 집 앞에 샘을 파서 항상 시원한 물을 매일 드시게 하여 마음을 안정시켜 드렸다고 하며, 이 샘이 바로 영천으로 지금도 보존이 되고 있다.
대한독립운동사적비가 흥덕장학당 입구에 서 있다. 이 비는 1919년 을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전라북도 감독 노진용, 부감독 오의균, 재무관 이휴열, 황종관, 고문 강대직, 이석열, 나홍균, 이종택, 이강열, 신용수, 이철환, 홍종화, 이우철, 심봉헌, 김양평, 백낙일, 통신원 박기동 등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며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는 등 구국에 공헌한 것을 기념해서 1960년 고창군 유지들이 뜻을 모으고 협력하여 비를 세운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곳은 우리민족의 자주, 자력을 바탕으로 독립에 앞장서온 역사적 고장이자 교육을 위해 선구자적 역할을 해 온 역사적 현장이 많은 곳이다.
|
|
|
|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