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보국안민·반봉건·반외세를 외친 동학농민혁명
|
|
공음 구수네 기포는 전국적 확산 계기
|
|
2018년 03월 28일(수) 00:34 [(주)고창신문] 
|
|
|
| 
| | ↑↑ 공음면 구수네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기포지 기념탑 | ⓒ (주)고창신문 | |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고종 31) 음력 3월 20일 봉건정부의 갖가지 수탈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인내천(人乃天) 사상인 “사람이 하늘이다”고 주창하며 반봉건과 반외세 척결을 주창하던 동학교도와 농민이 봉기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꿔 놓은 사건으로 우리민족 해방운동사 또는 민중운동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봉건지배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삼정의 문란과 19세기 후반 27회의 농민중심 민란이 발생하고, 1864년 동학탄압으로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죄를 벗기고,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교조 신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영도자인 전봉준 장군은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 태생으로 소년기까지 고창에서 지내다 서당을 운영하던 부친 전창욱을 따라 정읍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으며, 정읍 고부에서는 동학접주를 하면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적극적으로 항거하게 되었다.
1892년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해 만석보 개수에 따른 수세를 징수하고, 아버지 공덕비건립과 불효·불목·음행·잡기 등 각종 죄를 씌워 잦은 수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만석보는 농민들을 동원해 만들고, 농민들은 수세가 과중해 경감을 청구하기 일쑤였으며, 만석보 밑에 필요치 않은 만신보를 쌓고 농민들에게 고율의 수세를 징수하여 700여섬을 착복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1893년 11월 익산군수로 밀려 났던 조병갑이 임지에는 부임조차 하지 않고 유임되고,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로 다시 오자 다음날인 1월 10일 동학접주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을 중심으로 고부의 말목장터에 많은 농민들이 모인 다음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조병갑은 도망가고, 무기고를 부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을 풀어주고,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수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질이 나쁜 아전들을 처벌하였으며, 만신보를 헐어 냈다.
조정에서도 조병갑을 체포해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 박원명을 임명하였으며 책임을 묻지 않고 평화롭게 해결한다는 약속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약속과 다르게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가장 안전한 고창으로 들어온다. 당시 남부지방 일대의 가장 큰 세력인 손화중·김개남 접주와 함께 1894년 3월 20일(음력)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4,000여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모여서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손화중·김개남을 영도장으로 임명하여 창의문을 낭독하고 외세 배척과 탐관오리 척결, 보국안민을 외치며 기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무장현과 아산 독곡, 흥덕 사포를 거쳐 고부관아를 거쳐 백산으로 진출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는 고창군 공음면 구수네마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기념탑이 서 있는 곳으로 이마을에 오래 살았던 송문수 집에서 전봉준, 손화중, 송문수, 정백현, 김성칠 등이 모여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해서 1894년 3월 20일 기포해서 전국적인 혁명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
전봉준 장군 생가 1855년 12월 3일(음력)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철로이고 녹두는 체격이 작으면서 똘똘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13세때 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다 이사하였으며, 도산천에 갈매기가 노는 것을 보면서 지었다는 백구시(白鷗詩) 한편이 전해지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은 불상의 배꼽부분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비기가 들어 있다 하여 1892년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중 한사람인 손화중포 도인들이 꺼내서 보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손화중 도소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라감사 이서구가 사람을 시켜 비기를 꺼내려다 괴성벽력이 쳐서 꺼내보지 못하고 다시 봉했다는 애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동학농민혁명을 관할 현이었으나 피해가 없었던 곳이다. 1894년 4월 초 1만여 명의 농학농민군들이 무혈입성해서 감옥에 있던 40여명의 농학농민군을 석방하였으며, 여시뫼봉에서 3일간 휴식과 훈련을 하였다. 이들은 장성 황룡강전투에서 경군과 일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역사적인 곳이다.
무장 여시뫼봉은 151m의 야트막한 산으로 왕재산 또는 여시뫼봉으로 불러지고, 구 신왕초등학교 뒷산으로 정상에서 보면 사방이 확 트여 있으며, 농학농민군들이 무장현에 무혈입성 하여 일부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훈련하며, 전열을 재정비해서 세를 규합하던 곳이다.
손화중 도소는 성송면 괴치 2길 15에 있으며, 손화중은 정읍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포교를 시작한 후 정읍을 거쳐 무장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활동적인 공간이면서 많은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는 성송으로 도소를 옮겼다고 한다. 손화중은 무장, 정읍, 고창, 부안은 물론 광주, 나주, 장성, 담양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손화중 피체지는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자 부안면 인촌로 322-65에 있는 이씨 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동생, 조카, 처남들이 처형당하고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실지기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아라”고 한 뒤 잡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최근 다른 장소가 피체지라 하여 시급히 조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고창읍성은 동학농민군들이 당시 정읍, 흥덕을 거쳐 고창에 입성하여 옥에 투옥되어 있던 동학도와 죄수들을 풀어주고, 읍성 앞에 살며 부정축재를 일삼던 은대정의 집을 불태웠다.
흥성동헌은 흥덕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였던 곳으로 적극적 사회개혁이 추진되었다. 차치구는 동학농민혁명당시 고부봉기에 참여하고 전주입성에 앞장섰다. 또한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입암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지내다 흥덕 관아로 끌려가 동학농민군과 함께 처형당했다.
|
|
|
|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