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6-04-22 | 05:53 오후

로그인 회원가입 기자방 원격

    정치/지방자치 사회 교육 문화/생활 지역소식/정보 고창광장 독자위원회 전북도정 기타

 

전체기사

커뮤니티

독자투고

공지사항

개업 이전

편집회의실

뉴스 > 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월계마을 1974년 전국 최우수 새마을 선정

쌍괴정(雙槐亭), 희구정(喜懼亭) 등 문화유적 소재

2018년 03월 31일(토) 20:25 [(주)고창신문]

 

↑↑ 조선 성종 때 경상감사를 지낸 박서봉이 세운 희구정

ⓒ (주)고창신문

고수면 장두리는 고창에서 국도 23번을 따라 고수면 소재지와 남고창 IC 입구를 거쳐 부곡 잔등을 넘어 시작하여 성송면 경계까지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장두리는 고종 32년(1895) 수곡면(水谷面) 월계리와 오산리, 장두리로 나뉘어져 있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오산리, 월계리, 신월리 일부와 무장군 성송면 사내리 일부가 병합되어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장두리는 법정리로 장두·오산·월계 등 3개 행정 분리로 형성되어 있다.
장두마을은 북향(北向)으로 풍수상 노루 형국울 하고 있다. 마을 이름인 장두가 章頭⇒章斗⇒長斗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1914년 부군통합령에 따라 고사면과 수곡면이 통합되어 고수면이 되면서 장두(長斗)마을로 되었다.
장두마을은 광산 김씨인 김상대가 성동면 사내에서 장두로 입향한 1835년 전후 현성된 것으로 김상대의 호적단자에 기록되어 있다.
장두마을의 자연환경은 노령산맥에서 뻗어 나온 구황산에서 성송면 계당리 추산봉을 지나 초내마을을 거쳐 장두에서 멈추는 형국이다. 수계(水系)는 장두마을 동쪽과 서쪽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동쪽 수계는 초내마을 북쪽의 능선에서 시작하여 장두와 초내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평지천과 합류한다. 서쪽의 수계는 성송면 학천리 잿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다 평지천과 합류한다.

↑↑ 1974년 전국과 전라북도 새마을사업 최우수상을 수상한 월계마을 전경

ⓒ (주)고창신문

오산마을은 본래 수곡면에 속해 있었으나 광해군 12년(1620) 금녕(金寧) 김씨가 입향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마을 이름도 鰲山에서 五山으로 바뀌었는데 자라 오(鰲)를 썻으나 일제강점기에 다섯 吳자로 바꾸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 앞 냇가에 자라머리와 비슷한 돌덩이가 있었으나 하천공사 때 매몰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월계마을은 마을 앞에 흐르는 냇가에 달이 비치면 그 모양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여 월계(月溪)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세조 9년(1,463년)에 밀양박씨 양오 박서봉(朴瑞鳳)은 은산부원군의 고손자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스승 김종직과 친척이 화를 당하자 고창으로 들어오면서 월계의 동쪽에 있는 신곡(新谷)에 터를 잡았는데 도둑이 자주 난다는 풍수설에 따라 1,700년대 월계마을로 옮겨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산(光山) 김씨는 1,790년에 해리면 왕촌에서 계암처사 김희길이 이주하면서 후손이 번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장두리 3개 마을에는 120세대, 249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월계마을은 1970∼1980년대까지 농촌근대화를 위해 전국적인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마을로 고창군 새마을사업의 역사에 한 핵을 만들었던 마을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부에 의하여 1973년 1월 16일 대통령령으로 내무부에 새마을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과를 두었으며, 동년 3월 7일 대통령비서실에 새마을담당관을 설치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시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부지원금을 대폭 늘려서 지원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 초반까지 시멘트와 철근 등 지원비용의 절반가량을 투자해 지원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지원액을 보면 1973년부터 1979년까지 4,252억원의 정부예산과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성금인 2,032억원도 지원금으로 활용되었다. 이 때는 아침과 저녁마다 방송을 통하여 ‘새마을 노래를 방영하고, 새마을지도자 등 사회지도층과 공무원들의 교육,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일간지 소개, 공장새마을운동 도입 등 범국민적 실천운동으로 키워 나갔다.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농촌근대화, 지역 균형발전, 의식개혁을 목표로 추진되었던 국민운동이였다.
월계마을은 원래 비가 조금만 와도 마을과 마을 앞 하천이 범람하여 가옥이 침수되고 도로와 농경지가 유실되던 곳으로 상류지역인 청계마을의 산과 계곡이 길고 인근 연동마을과 초내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만 오면 주민들이 다닐 수 없고, 도로가 잠기면 마을 뒤쪽의 먼 곳으로 돌아서 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1973년 새마을사업의 일한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북에서는 첫 번째의 새마을사업으로 하천제방을 석축으로 쌓을 때 마을 주민들이 총 동원되고 아침마다 모여 둑을 만들고 석축을 쌓아 사업을 완료하였다. 또한 비좁은 마을 안길의 확·포장과 담장개량, 새마을 회관과 창고의 신축, 메탄가스 설치 등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주거환경을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획기적으로 개선하게된 것이다.

↑↑ 고종 4년(1867)에 박양휴가 세운 장두마을의 쌍괴정

ⓒ (주)고창신문

이러한 작업을 할 때마다 새마을노래를 부르고 지게와 리어카, 소쿠리와 세숫대야 등을 이용해서 골재를 나르고 공동작업을 해서, 리어카도 다니기 힘든 마을안길과 농로를 삽과 괭이를 들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만들었으며, 초가집도 지붕을 벗겨 내고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페인트 도색으로 일시에 농촌의 환경이 깨끗이 바뀌게 된 것이다.
새마을 사업은 마을 구심체인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등을 중심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한 가구당 한명이상 자율적으로 참여해서 만들어 낸 결과로, 돈 만 따지는 지금의 세상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일을 해 낸 것이다.
월계마을 새마을사업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고, 주민들이 혼연일체 되어 피땀 어린 노력결과 1974년 전라북도 최우수새마을과 전국 최우수 새마을로 선정되었으며, 당시 박병권 새마을지도자는 대통령 훈장(근면장)을 받는 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장두마을에는 쌍괴정(雙槐亭)이 있다. 이 정자는 밀양박씨 양오 박서봉(朴瑞鳳)의 10세손 박승현(朴升鉉)이 마을 앞에 느티나무 2주를 심었는데 나무가 번성하면서 녹음이 짙어지자 그의 손자인 양휴(陽休)가 고종 4년(1867)에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을 만들고자 세운 정자가 쌍괴정이다. 지금도 보호수로 두 그루가 있으며, 수령은 253년으로 나무 둘레가 4.2m나 된다.
쌍괴정이라는 편액은 전남 보성출신으로 학문과 서예에 능한 설주 송운회(1874∼1965)의 친필이며, 쌍괴정 역사를 기록한 쌍괴정기의 시문은 송사 기우만과 직지사 이승욱이 쓰고, 근차쌍괴정은 임암 김훙석이 썻다.
또한, 장두마을 입구에 있는 희구정(喜懼亭)은 양오 박서봉(朴瑞鳳)이 조선 성종 때에 경상감사로 재직하다가 노친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돌아왔는데, 무오사화로 인해 스승 김종직과 친척들이 화를 입자, 이때 화를 피하려고 고수면 산양동(山陽洞)으로 들어와 살면서 추산아래 손수 지은 정자로 알려지고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하자 후손이 1989년 3월 현재 위치하고 있는 장두마을 입구로 옮겨온 건물이다.
광산김씨 정려각은 장두리 44-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말에 김기두(1828∼1901)의 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로 부친이 병에 걸리자 눈 속에 싱싱한 채소를 밥상에 올렸고, 부친의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친 입에 넣는 등 남다른 효행으로 ‘호남삼강록’에 올라 있으며, 고종 31년(1894) 정려하였으며, 현판에는 ‘효자 광산 김기두 지려, 고종갑오삼월일명정’이라 쓰여 있다.
장두리의 대표적 인물로 월계마을 출신 김재관(1888∼1958)은 최면암 의병진에 참가하고 호남의병창의대와 합동으로 고창전투 참가, 독립의금부 창립가담 및 활동을 하였다. 고종황제 인산때에는 성송면 추산봉에 망곡단(望哭壇)을 만들어 2년 복을 마치기도 하였다. 1980년 광복절날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박성근(1902∼1963)은 장두리에서 태어났고, 영무장(영광,무장,장성,함평 지역) 농악의 상쇠명인으로 굿판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부포놀음의 기능이 출중하였다. 1947년 창경궁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 특등상과 개인상을 수상하였으며, 미국공연까지 한 농악의 명인이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제46회 장애인의 날 기념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

봄의 기억, 길 위에 남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고창군 예비후보자 현황..

과거를 품고 내일로, 신재효판소리박물관 재개관!..

회사소개 - 조직도 - 임직원 - 윤리강령 - 편집규약 - 광고문의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회원 약관 - 구독신청

 상호: (주)고창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404-81-20793 / 주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성산로48 (지적공사 옆) / 대표이사: 유석영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유석영
mail: gc6600@hanmail.net / Tel: 063-563-6600 / Fax : 063-564-8668
Copyright ⓒ (주)고창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