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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녹두장군 동상,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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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한 장소 서울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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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11일(금) 21:16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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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영도자인 전봉준 장군(1855∼1895) 동상이 순국 123년 만에 서울시 종로구 네거리에 세워졌다.
(사)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는 지난해 8월부터 서울시(박원순 시장)와 전봉준장군의 동상 건립을 협의하기 시작하고, 2억7000여만원의 국민성금을 모금해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지난 24일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의 영풍문고 앞에서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1855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까지 살았고, 어려서부터 담력과 기백이 넘치고 학식과 무예를 겸비하였으며, 체격은 왜소(152cm) 하지만 강기가 있어 녹두장군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당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따라 타 지역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으며, 고부에 거주하면서 동학접주를 하고 있을 때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데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고부관아를 습격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 후 안핵사가 책임을 묻지 않고 조병갑을 조치하기로 하였으나, 조정에서 태도를 강경진압으로 바꾸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한 최대의 세력을 가진 손화중 접주가 있는 고창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1894년 3월 20일 공음면 구수네에서 4천여명의 동학농민군들이 기포하여 전국적인 봉기로 확산시키게 되었다.
1차 동학농민혁명 봉기이후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개혁 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이 침략하자 이를 몰아내기 위해 같은 해 9월 2차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전봉준 장군은 순창에 피신중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되어 123년 전인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언도받고 다음 날 새벽 2시 함께 혁명을 하던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과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우자는 논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은 1990년대부터 있었으나 별성과가 없었고, 2016년 8월 전주를 찾아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들을 만난 박원순 서울시장이 순국 터인 종로 네거리에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을 수용하면서 동상 건립이 급물살을 탔다.
마침 전옥서 터가 서울시유지로 돼 있어 지난해 1월 동상 건립을 위한 재단을 만든 지 1년 4개월 만에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동상은 고창출신 원로 조각가인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좌대 위에 전봉준이 형형한 눈빛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가마 위에 앉아 압송되던 전봉준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제막식에 참석한 박원순 시장은 "전봉준 장군이 123년 전 구속된 몸에서 이제 자유의 몸으로, 해방된 몸으로 이 자리에 돌아왔다"며 "그때는 패배자의 신분이었지만 이제 승리자의 신분"이라며 전봉준 장군의 얼을 기렸다. 이어서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이 내세운 반봉건과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해 의병 운동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척왜양창의 정신‘은 4·19혁명, 5·18 민주항쟁, 6월 항쟁, 최근엔 촛불혁명으로 우리 현대사에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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