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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전념하라는 내부지향적 구조를 보이는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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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필, 아계, 석봉, 추사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구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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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 20일(목) 11:25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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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학문에 전념하라는 내부지향적 구조를 보이는 옥산서원
조선의 명필, 아계, 석봉, 추사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구인당
차선도 없는 좁은 폭의 이차선 도로가 들판을 가로질러 활주로처럼 곧장 뻗어 있는 ‘옥산서원길’을, 정취에 취해 한참 달리다보면 서원이 앞에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런데 웬일인지 서원 주차장과 주변 도로에 수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인데다 서원이라는 엄숙한 공간의 특성상, 방문객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그 이유는 쉽게 드러났다. 서원 바로 앞이 시원한 바람과 깊지 않은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이었던 것이다.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해 계곡을 찾은 사람들로 서원 주변이 붐비고 있었다. 서원 관리보다 계곡에 물놀이를 하러 온 관광객 관리가 더 힘들다는 해설사의 하소연에 공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자옥산을 배후로 두었는데 자옥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든 계곡을 자계천 혹은 옥산천이라 부른다. 긴 세월 지켜온 키 큰 활엽수들이 짙푸른 녹음을 드리우고 깊지 않은 물줄기가 너럭바위를 쓸어내리며 흐르는 빼어난 경관을 앞에 둔 옥산서원은 배산임수의 자연 지형에 스며들어 한 폭의 풍경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가는 길에는 옥산서원 유물관이 있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의를 하였더니 개방된 유물관은 아니고 자료 보관용 유물관이라고 한다. 잠긴 유리문 안쪽에 청분각(淸芬閣) 현판이 보인다. 청분각은 1972년에 후손들이 관련 서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도서관인데 청분각의 자료들이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실내는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것이 아마도 사람들에게 개방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계곡에서 몸을 담그며 놀고 있는 사람들의 왁자한 모습이 싫은 듯 서원의 외삼문은 들어가는 동쪽 문만 개방하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임을 알리는 홍살문은 없고 하마비는 지금의 서원길과는 한참 동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현재의 도로나 지형이 서원 건립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듯하다.
서원의 외삼문은 역락문(亦樂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구절이 그 출처이다.
‘큰 즐거움’에 대한 기대를 안고 외삼문 안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막아서는 커다란 판벽의 건물이 당황스럽다.
역락문 바로 앞에 해자처럼 물이 흐르는 도랑을 건너면 양쪽 측면의 칸까지 합하여 전면 7칸 ‘무변루(無邊樓)’라는 2층 누각이 작은 출입문만 제외하고 밖으로 향하는 모든 문을 다 닫은 채 요새처럼 버티고 서있다.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며 가벼운 토론을 하던 누각으로 원래는 납청루였으나 이언적의 제자 노수신이, ‘아름다운 경치가 끝이 없다’는 뜻의 ‘풍월무변’에서 영감을 받아 무변루라 개칭했다.
안쪽으로 들어오면 앞마당에서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독특한 통나무 계단이 위태롭게 걸쳐있고 밖으로는 폐쇄적인 무변루가 내부를 향해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위기지학의 학문을 추구하는 유학의 내부지향적 특징이 건물에도 반영되어 학문에 전념하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무변루가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보통 2층 누각이 외삼문의 역할을 하면서 방이 없는 마루로 되어 있는데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양쪽으로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옛날 ‘계곡 뷰를 갖춘 풍광 좋은 게스트하우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하고 상상해 본다. ‘무변루’의 현판이 석봉 한호의 글씨라는 설명에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무변루 양쪽으로 동재인 민구재(敏求齋), 서재인 암수재(闇修齋), 맞은 편 강학공간인 구인당(求仁堂)이 모두 전면 5칸 건물로 비교적 길이가 긴 건물이다 보니 서로 어깨를 겯고 서 있는 네 건물로 이루어진 네모진 중정이 마치 하늘을 향해 창(窓) 하나 낸 방 같은 느낌이다. 중정에는 관솔불을 놓아 주변을 밝히기 위해 세웠던 정료대가 있는데 팔각석주 위에 연꽃문양이 새겨진 갑석을 얹어 멋을 내었다.
서원의 강학 공간인 구인당은 회재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인(仁)을 추구하고자 한 회재의 사상이 짙게 배인 구인당 처마아래는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강당 안쪽으로 구인당 현판을 걸었다.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구인당의 글씨는 석봉의 글씨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당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밖을 향해 보면 추사가 쓴 옥산서원 현판과 등을 맞대고 또 하나의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기리고자 그가 세상을 떠난 20년 후인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의 주도로 건립되어 1574년 선조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아계 이산해가 옥산서원의 현판을 썼는데 구인당이 1838년(현종 4)에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 다시 지어 사액을 받을 때는 추사가 현판을 썼다. 이런 연유로 구인당에 걸린 옥산서원 현판은 앞뒤로 두 개이다. 구인당에서는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명필, 아계와 석봉, 추사의 글씨까지 감상할 수 있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마루 양쪽에 한 칸씩 방을 들이고 각각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교수와 유사(有司)가 기거한 공간으로 오늘날의 교무실이나 행정실과 같은 공간이다.
구인당의 오른쪽 뒤편에는 이언적 신도비를 모신 비각이 있다. 1577년 회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신도비는 고봉 기대승이 글을 짓고 아계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 비의 머리격인 이수는 꿈틀대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 황색과 청색으로 채색을 하였고 비를 받치고 있는 것은 거북 형상의 귀부(龜趺)인데 발가락이 4개인 점이 이채롭다. 비신의 높이만 205cm이고 전체 높이는 320Cm에 달하는 신도비는 원래 자계천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으나 훼손을 염려하여 서원 내부로 옮겼다.
구인당 왼편 뒤로는 서적을 보관하던 경각이 있다. 옥산서원에서 다른 서원보다 더 많은 서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원 밖으로 서책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엄격한 폐쇄성은 소통과 개선을 방해한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전수하는데 용이하고 유물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모든 것들은 양면적 현상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옥산서원은 강학공간을 앞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태이며 전저후고의 구조로, 뒤로 갈수록 높아져 제향공간은 강학공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역락문에서부터 무변루, 구인당, 제향공간인 체인문(體仁門)과 체인묘(體仁廟)의 중앙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체인묘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사당으로 이언적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체인(體仁)이란 인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인(仁)을 중시한 회재의 사상이 다시 강조됨을 느낀다. 다른 사당은 보통 ‘사(祀)’자를 쓰는데 옥산서원에서는 왕의 사당을 표현할 때 쓰는 ‘묘(廟)’자를 써서 왕의 위치에 버금가는 이언적의 높은 위상을 표현하고 있다.
옥산서원의 제사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제물로 올리는 것과 제물을 나르는 방식이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구인당 뒤에는 긴 사다리와 짚 융단이 놓여 있는데 제사 때는 이 긴 사다리를 구인당과 체인묘 사이의 공간에 놓아 연결하고 짚 융단으로 덮어 그 위로 제물을 나르는 것이다. 음식 나르는 들것인 가자(架子)위에 검사를 마친 제물을 올리고 4명이 가자를 메고 걸쳐진 사다리 위로 체인묘까지 나른다. 무거운 돼지를 통째로 들고 12시를 넘긴 깊고 깜깜한 밤에 높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한 지혜인 듯하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9개의 서원 중 하나이지만, 이미 9년 전인 2010년 7월 31일 옥산서원, 독락당, 동강서원을 포함해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 중복 등재되어 있는 유산이다.
경주에 가면, 근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과 독락당 뿐 아니라 옥산서원과는 10km이상 떨어져 있지만 양동마을 또한 회재 이언적과 관련된 3종 세트로서 같이 보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양동마을에는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건물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과 종가 사랑채인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을 만날 수 있다.
언덕 위에 보란 듯이 자리 잡은 향단은 51세의 회재가 잘 나가던 시절에 지은 건축물이라면 옥산정사로도 불리우는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은 40세의 회재가 사간원 사간에 재직할 당시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자계천 계곡에서 은둔하며 살던 집의 사랑채이다. 독락이라는 이름에서도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 속에서 학문과 풍류를 즐기는 삶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독락당에 7년간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주었는데 세심대(洗心臺)도 그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 옆 바위에 세심대라고 새긴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라 한다.
독락당 뒤편으로 보이지 않도록 숨겨놓은 듯한 정자인 계정(溪亭)에서 풍류는 극치에 달한다. 계정으로 가는 길목의 토담에는 중간에 나무 살창을 넣어 계곡과 소통하도록 개성 있게 멋을 부렸고, 마치 계곡물에 발을 담근 듯, 바로 위에 세운 정자는 계곡 전체를 정원처럼 들여 자연을 관조하며 세상 근심을 잊게 한다. 독락당은 이처럼 회재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었기에 훗날 세심대 옆에 옥산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퇴계 이황에게 영감을 주고 영남학파 형성의 선구가 된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은 영남의 양대(兩大) 서원으로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연총(淵叢)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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