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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학혁명의 횃불은 무장현에서 타올랐다

2021년 02월 23일(화) 15:30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강희석 문화해설사

(머리말) 동학혁명이 무장현에서 일어났다(기포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무장포고문 등
여러 기록에 대한 학계의 연구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마침내 2020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러나 여전히 “왜 무장에서 일어났을까”에 대한 배경과 이유는 불충분하다. 필자는 무장기포의 배경과 이유를 더욱 더 찾아내어 동학혁명의 의의를 밝히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19세기 무장지역의 사회 상황)
19세기 무장 고창 지역에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노사 기정진의 영향을 받은 노사학파 유학자들은 1862년(임술민란) 농민항쟁당시 사회, 경제적인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개혁론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기정진은 토지소유가 불공평해진 현실을 지적하고 농민의 경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삼정의 조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62년 농민항쟁 당시 기정진의 문인이었던 무장의 강인회나 정하원, 고창의 안중섭, 흥덕의 황수정 등이 삼정의 제도적인 측면이나 토지소유의 불균등을 해소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위와같은 학자들은 고창의 여러 유학자들에게 토지균분의 필요성을 자주 언급하였기 때문에 고창지역에 조세 개혁 뿐만아니라 토지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1880년대 후반에는 동학이 무장현 지역에 널리 퍼졌는데 동학 지도자들(손화중 등)은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과 매관매직 등으로 인륜이 무너지고 나라가 위태롭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노사학파 등 고창지역 유학자의 사회개혁론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정에 대한 불만과 사회개혁에 의견이 일치함에 따라 일부 유학자들이 동학에 가담한다. 동학혁명 시 전봉준 장군의 비서인 정백현은 노사학파의 중심 학자인 정학원의 제자이다.

(혁명전후 전봉준의 활동)
전봉준(1854년 12월 - 1895년 3월)은 30대 중반부터 시대의 모순에 분노하고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선각자였다. 호남의 동학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사회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농민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이루고자 혁명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직도 병력도 없었다. 혁명을 일으키려면 최소 4-천의 병력은 있어야 함을 알았다. 그는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할 결심을 한다. 1892년 동학에 입도, 고부접주가 된다. 고부접주 휘하에는 고작 1천여 병력. 혁명을 거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전봉준은 무장포 대접주 손화중 휘하의 대병력을 끌어들일 결심을 한다

(혁명전후 손화중의 활동)
1. 손화중 ( 1861년 12월 - 1895년 3월 )은 1881년(고종 18년) 처남 유용수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공부. 동학에 입도. 1883년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 시작, 정읍 부안에서 포교 시작하고 무장에 정착. 1891년 3월 손화중은 호남도인 남계천 등과 해월을 방문. 1892년 8월 도솔암 비기 탈취, 호남 일대에 알려지고 휘하에 도인들이 많이 모여듬. 1892년 10월 삼례에 도회소 설치. 삼례 교조신원운동에 손화중이 많은 교도들을 동원. 11월2일 교도들의 의송단자 전할 때 고부 전봉준, 남원 유태홍이 전주 감영에 갔다.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 때 손화중 호남대표로 참가.
2. 손화중은 80년대 초 포교를 시작하고 부안, 정읍, 무장 등지로 돌아다니며 90년
초까지 동학 활동에만 열중하였다. 90년 초에는 전봉준의 주장에 내심 동의하였지만
정치적인 야심은 나타내지 않았고 신중파였다. 그러나 휘하에 도인들은 크게 늘어났고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세력(병력)을 갖게 되었다. 전봉준이 그동안 여러번 봉기를 주장했으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응하지 않았다.

(무장기포의 원동력)
1.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일부 노사학파 유학자들의 동학 가담. (정백현, 송문수, 강경
중 등 ). 일반 농민들이 동학을 무뢰한 집단으로 보지 않았다 ( 도적떼로 보지 않
았다 ). 그래서 쉽게 입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2. 손화중포에 가담한 일부 유학자들의 사회개혁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재인부대등 동학군은 사나웠다 (용맹했다).
3. 무장현이 면적과 인구면에서 크다. 무장에서 보면 영광과 법성포는 가까운 생활권
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법성포에 모이는 서해안의 소금과 수산물이 성송면 암치재
를 통하여 장성과 담양 지역에 공급되었다. 그래서 장성과 담양은 조선시대에도
무장현의 생활권이고 교통이 많았다.
4. 실제로 손화중포가 거느리는 지역은 무장현, 고창현, 흥덕현, 영광, 장성, 담양 까
지로 지역이 광범위하고 교도수가 타 지역보다 크게 많다. 그래서 손화중포가
타지역보다 규모가 크고 강력한 세력(병력)을 갖게 되었다.

(혁명 준비 활동)
사실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호남의 동학지도자들은 2년여 동안
여러번 만나 “폭정을 제거하고 세상을 변혁하자”는 생각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 모임
의 중심에는 전봉준이 있었고 전봉준은 기회만 있으면 즉 병력을 4-5천만 끌어 모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 봉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발통문에 보면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사“ 라는 조항이 있다. 물론 직접적인 고부봉기 이유는 만석보 수세 징수등 조병갑의 착취와 만행에 있었지만 전봉준은 실제 끌어 모을 수 있는 병력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고부봉기를 단행하여 조병갑을 쫒아내고 관아를 점령하여 고부군을 평정하였지만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고부 봉기에 참여한 농민은 고작 1천여명, 혁명을 위하여 한양으로 직행할 병력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1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4-5천의 병력이 모였다면 바로 전주 감영으로 진격하고 서울로 직향하여 조정을 바꾸려는 혁명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농민군은 1천여명에 불과했고, 11월에 사발통문을 돌렸다고 하나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사전 준비는 전혀 없었다.

( 무장기포와 준비 과정 )
1.고부봉기이후 조병갑을 쫒아내고 고부군을 평정한후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두어달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조정에서는 진상조사를 위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 보낸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이 시작되고 고부봉기의 주모자들은 잡히면 모조리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전봉준과 지도부는 어디론가 피신해야만 했다. 다행히 호남 동학지도자들은 1893년 가을부터 여러번 만나 혁명 추진을 모의하고 거사 시기와 병력을 모으는 방법을 구체화하는 중이었다. 2월말 지도부는 호남 각 포접에 ”3월 봉기“를 알리는 통문을 발송했다. 병력은 몇 개 포에서 한 곳으로 집결하면 되지만 7-8천 정도의 병력을 모으려면 한 개 포에서 4-5천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하나, 손화중포가 선도해주어야 한다. 전봉준은 손화중포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어차피 잡히면 죽는 몸이다. 갈곳이 없다. 무장포로 들어가 어떻게든 손화중을 설득해야만 한다. 죽기살기로 손화중을 설득하고, 마침내 손화중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2. 3월10일 경부터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장현 구수내에 모여들고 농민군은 무기를 모으고 죽창을 만들고 군량을 모으고 전쟁준비를 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농민군이 4천명 규모로 모이고 무기와 군량을 어느정도 갖추자 싸워볼만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바로 봉기할 날자를 잡았다. 봉기 날자를 알리는 창의문을 전국에 선포하고 통문을 전국에 발송한다. 갑오년 3월20일 전봉준 손화중이 주도한 농민군 4000여명이 ”무장현 동학인 포고문“을 발표하고 고창땅 무장현 구수내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무장기포다.

(무장기포의 의의 )
19세기 후반 조선은 극도로 부패하고 기강이 무너져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다. 임술민란 이후 수십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1개 고을에서 일어나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곧 진압되고 말았다. 중앙 조정을 바꾸어야만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혁명이 필요함을 알았다. 갑오년 1월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두어달 전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하자”는 사발통문에서 보듯이 문서상 모의는 있었지만 구체적 계획도 준비도 없었고 병력을 동원할 방책도 없었다. 혁명을 꿈꿨지만 꿈이었지 실행은 불가능했다.
혁명은 무장포 대접주 손화중의 대병력 동원이 실현됐기에 가능했다. 무장현에서 4000명의 대병력이 일거에 출정하고 정읍, 태인, 부안, 금구의 농민군이 백산 한곳에서 모여 8000여명 대병력을 이루었다. 이제 이만하면 혁명을 시작할만한 것이다. 그렇게 손화중포의 농민군 4000여명은 혁명을 시작하였다. 동학혁명의 횃불은 그렇게 무장에서 타올랐던 것이다. 무장에서 타오른 횃불은 북상하여 고부현을 점령하고 전주감영을 점령하고 서울로 올라가 중앙조정을 타도하려는 진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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