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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등불 걸린 천등산에 봉황이 머문 자리,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15호, 극락전

2021년 06월 24일(목) 13:03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하늘의 등불 걸린 천등산에 봉황이 머문 자리,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15호, 극락전

<봉정사의 국보와 보물>
국보 제15호 극락전
국보 제311호 대웅전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 고금당
보물 제1614호 영산회상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음보살좌상 (화엄강당)
보물 제1642호 영산회 괘불도 (대웅전)
보물 제1643호 아미타설법도


새벽 여명이 산너머 오기도 전 아무도 모르게 마당을 쓸었을 스님의 비질은 절마당에 정갈한 무늬로 남아 한 발 내딛는 발자국을 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지나며 조심성 없는 발자국이 함부로 찍히고 결국 비질의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만 언제나 새벽은 스님의 비질로 열릴 것이다. 마음 다스리는 일도 그런 것이라고, 무언의 가르침이 빗자루 연필 삼아 편지로 남았다.

아담한 규모의 편안하고 아름다운 산사 봉정사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가장 한국적인 건물을 보고싶다”는 여왕의 요청에 의해 선택된 장소이다. 여왕의 방문으로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고 2019년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 앤드루 왕자가 20년 만에 퀸스로드(Queen’s road)를 따라 봉정사를 방문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봉정사는 안동시 천등산의 산중턱 경사면을 남향으로 따라 오르며 넓게 펼쳐진 지대에 좌우로 조성된 경사형의 병렬식 사찰이다. 완만한 구릉지의 송림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산사는 임진왜란에도 화를 입지 않았고 여러 차례 중수를 하면서 본래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건축양식을 고루 갖추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사찰이다.

봉정사는 영산암이라는 암자를 바로 옆에 두고 있는데 영산암은 한국 10대 정원이라 할 정도로 공간미가 있어 ‘나랏말싸미’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봉정사는 신라시대인 672년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능인대사의 스승인 의상대사 창건설도 있지만, 의상대사가 귀국 후 처음 세운 사찰은 부석사로 알려져 있고 봉정사는 부석사보다 4년 앞서 세워진 사찰이기 때문에 봉정사는 의상대사 귀국 전 이미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봉정사가 깃든 천등산은 원래 이름이 대망산이었는데 “하늘의 등불”이라는 의미의 천등산으로 바뀌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능인대사는 젊은 시절, 바위굴에서 깨우침을 위해 수련하였는데 어느날 밤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대사가 끝내 여인을 꾸짖어 깨달음을 주니 여인은 옥황상제의 등불을 남기고 떠난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바위굴은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은 '천등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긴 수행을 마친 능인대사는 마땅한 절터를 찾기 위해 법력으로 종이봉황을 접어 날렸는데 봉황은 학가산을 거쳐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내려앉았다. ‘봉황이 머물렀다’는 의미의 봉정(鳳停)은 이와 같은 능인대사의 창건 설화에서 유래한다.

매표소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길은 그리 길지 않고 차와 사람이 섞여 오가며, 차량으로 봉정사 바로 앞 주차장까지 진입할 수 있어서 걷기 길의 흥취를 반감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송림보다 더 밀도있는 참나무 숲길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령 210년의 보호수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반려목처럼 만세루에 앞서 자리한 소나무는 웬일인지 스스로 뒤틀리고 꼬여 기묘한 형상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여근(女根)목이라 한다. 별일 없이도 스스로 비틀어지는 인간의 감정과 마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듯하다.

소나무 옆으로 투박하고 경사가 급한 돌계단 끝에 2층 누각 만세루가 양팔을 벌려 반긴다. 천왕문이 없이 만세루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현판을 걸고 인사를 한다. 덤벙주초 위에 놓인 6개의 기둥은 벌레에 쪼인 것, 떼어진 곳을 때운 것, 이어붙인 흔적이 보이는 것 등 온전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석축 역시 크기도 맞지 않는 막돌을 되는대로 거칠게 쌓은 느낌이다. 제멋대로 기운 옷차림을 괘념치 않는, 누더기 입은 성자처럼 당당하게 서서 세월의 풍파를 견딘다. 그 모습에서 녹록지 않은 삶의 진리를 깨닫고 조응하는 성인(聖人)의 품격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숙종 8년인 1680년에 건립된 만세루는 경사지면의 높낮이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남쪽에서 보면 2층이지만 뒷면에서는 단층이다. 앞면 5칸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을 얹은 누각 형태이다. 2층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통로이자 문이 되어 절마당으로 안내한다. 2층은 종루의 역할을 하듯 목어, 법고, 운판이 걸려있다. 보통 범종각에 네가지 사물(四物)을 같이 두는데 봉정사의 범종각에는 범종만 있다. 범종각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인 듯하다.

절마당에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원의 동재와 서재처럼 화엄강당과 무량해회가 동, 서로 배치되어 아담하고 정갈한 짜임새를 보인다. 대웅전 서쪽으로 나란히 극락전이 있고 그 앞으로는 고금당과 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 동쪽으로는 영산암으로 오르는 높은 돌계단이 놓여 동서로 길게 자리잡은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만세루의 맞은편 막돌로 쌓은 석축 위에 의젓하게 자리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과 깔끔함으로 빈틈없는 힘찬 기상을 전한다. 국보 제311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1999년부터 삼년동안 이루어진 건물의 해체보수공사 중 세종 17년인 1435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조선 초기의 건축공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이지만 전면이 더 넓어 정방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여느 한옥처럼 앞쪽에 툇마루가 있어서 법당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개성을 가진 건물이다.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의 포작은 단순 투박하여 힘있게 보인다. 양쪽면 하단을 둥글게 굴린 교두형첨차와, 마구리 모양이 밑으로 쭉 빠져 내려온 쇠서형살미는 초기 다포양식의 단순한 기법을 잘 보여주며 건물 안쪽 단청은 고려시대 문양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내부 뒷면 중앙에 기둥을 세우고 만든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배치하였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좌우로 모셨다. 천장에는 화려한 포작으로 사면이 둘러싸인 천판에 역동적인 용 두 마리를 그렸다.

봉정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의 닫집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한자로는 당가(唐家)라고 표현되는 닫집은 ‘따로 만들어진 집’이란 의미로 사찰의 불단이나 궁궐의 용상을 장식하는 조형물이다. 불전 내부 부처를 모신 장소에 따로 집 모형을 만들어 부처의 세계를 신성하고 숭고하게 표현하여 불국정토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닫집은 보통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포작(包作) 없이 천장에 용, 봉황 등 길상 상징물로 장식한 운궁형, 독립된 집 모형으로 따로 지붕이 있는 보궁형, 천장을 파고 들어 만들어진 공간을 포작과 그림 등으로 장식한 보개형이 있다. 대웅전의 닫집은 보개형이고 극락전의 닫집은 보궁형으로 분류된다.

대웅전과 나란히 서쪽에 위치한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전해주는 국보 제15호이다. 1972년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문 기록으로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첫 수리를 하였음이 밝혀졌는데 보통 전통 목조건물 수리는 100년 이상 지난 건물에서 이루어지므로 극락전은 1200년대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면 3칸, 측면 4칸으로 살짝 배를 내민 배흘림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놓인 주심포 양식으로 창방과 이어지는 복화반의 단청 무늬가 장식이 절제된 왕관처럼 근엄하고 고급스럽다.

중앙에 판문을 달고 양쪽에는 문 없이 살창으로 처리하였다. 창고처럼 보이기도 하여 법당의 모습으로는 독특하다. 창방에 칸마다 그려진 날렵하고 세련된 세 마리의 용은 청룡과 황룡, 흑룡을 표현하였는데 각 머리와 꼬리 양쪽에 ‘주상전하(主上殿下)’,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글씨를 써넣었다. 봉정사는 고려시대 태조와 공민왕 등이 방문하여 최고의 권력자들과 관계가 깊은데 그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 인(人)자로 보이는 맞배지붕 측면에도 밖을 향해 힘있게 뻗친 공포로 아름다운 개성을 연출하였다. 내부에는 협시보살이 없이 모셔진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궁형 닫집을 설치하여 엄숙하게 꾸몄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극락전과 대웅전의 사이에 서면 고려시대 건축양식인 극락전에서부터 조선 초기 대웅전, 조선 중기 화엄강당까지 역사의 강물에 띄운 배를 타고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대웅전의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화엄강당은 보물 제448호로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었다. 맞배지붕에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 양식인데 새의 부리같기도 하고 날개같기도 한 익공형살미가 장식적 요소를 드러내는 조선중기 양식을 보여준다. 강당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으나 기둥이 낮은 대신 공포를 크게 하여 균형을 살렸고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지금은 절의 사무를 관리하는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 훼손되지는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보물 제449호, 고금당이 자리하고 있다. ‘금당’은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세워지기 전 초창기의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으로 광해 8년인 1616년에 고쳐 지은 것이 밝혀졌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 양식 맞배지붕 건물로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맞배지붕 자체가 육중한 느낌을 주는 데다 지붕의 처마가 깊어 삿갓을 깊숙하게 눌러 쓰고 내면의 수련에 집중하는 수행자를 연상하게 한다. 그 숙연한 모습은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피라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의 깨달음을 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글·사진 유석영 조창환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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