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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방어를 위해 축성한 무장읍성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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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중심권에 위치한 교통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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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8월 24일(화) 16:37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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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성내리(城內里)는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속하는 법정리이다. 또한 무장면의 소재지로 고창군과 무장면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성내리는 조선 말기에 무장군 이동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성내, 내동, 상성, 이동과 일동면의 통정 등을 병합하여 성내리라 하고, 무장면에 편입하였다.
성내리는 아산, 성송, 대산, 해리, 상하, 공음면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이다.
공공기관으로 무장면사무소, 선운산농협, 무장파출소, 무장초등학교, 영선중•고, 무장보건지소 등 이 소재하고 있다. 또한 5일장이 지금까지도 열리는 곳이다. 성내, 내동 등 2개 행정분리에 64세대, 10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무장면의 변천사를 보면 백제시대에는 송미지현과 상노현에 속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757) 송미지현이 무송현으로, 상노현이 장사현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무송현은 성송면 삼태리에 장사현은 상하면 하장리에 치소를 두고 있었으며, 두 현의 건물 일부와 건물터, 성곽 등 유구가 남아 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고, 무송현(茂松縣)의 ‘무(茂)’와 장사현(長沙縣)의 ‘장(長)’자를 따서 무장현(茂長縣)이라 하였다. 고종 33년(1896) 무장군(茂長郡)으로 승격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폐합령으로 고창군에 합병되었다. 무장면은 1935년 면 폐합 시 종전의 석곡면(石谷面)의 일부를 병합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현재는 무장 성내 교흥 송현 원촌 강남 목우 덕림 옥산 고라 백양 신촌 만화 월림 도곡 송계리 등 16개 법정리와 39개의 행정분리로 되어 있다.
무장현의 치소인 무장읍성(茂長邑城)은 조선 태종 17년(1417) 관할구역 해안선에 출몰하는 왜적방어를 위해 병마사 김저래가 백성과 승려 등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읍성 내 사두봉(60m)을 중심으로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싼 평지 읍성이다. 둘레는 1,400m, 높이는 3∽5m로 넓은 들판 한 가운데 분지지형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장현은 지정학적으로 대부분 해안가를 끼고 있고, 이 지역의 바닷길은 인력과 물자를 쉽게 이동시킬 수 있는 해상통로로 이용되었다. 또한 해안을 이용한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은 영향으로 무장읍성은 행정적 기능보다 군사적 거점기능이 더 강하였다.
무장현 설치와 함께 무장진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417년 전라병영을 광산현에서 강진현으로 옮기면서 방어지역의 중첩을 피하고자 기존에 있던 흥덕진을 부안진으로, 목포진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선 세종 이후에는 현감이 파견되면서 무장진은 폐지되었다.
무장읍성 내에는 무장현 건물로 객사, 동헌, 내아, 남문(진무루), 읍취루, 정자 등이 있으며 현재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무장읍성과 관아가 사적 제346호로, 지방유형문화재 제34호인 객사, 지방유형문화재 제35호로 동헌이 있다.
2018년 11월에는 무장읍성 터 발굴조사 중 조선 최초 시한폭탄으로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왜군들을 벌벌 떨게 했던 “비격진천뢰”를 11점이나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사시 왜적과 전투를 위해 군기고에 보관하던 중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무장읍성을 점령하자 땅에 숨겨 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격진천뢰는 목표물에 날아가 폭발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제 폭탄으로 무장읍성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총 6점만 발견되었다.
일제 강점기 고창군 소재지를 지정할 때, 군내의 3개현 중 세력이 가장 약하고 가장자리 끝에 있는 고창현에 설치한 것은 일본의 간사함 때문이었다. 고창군 중앙으로 세력이 가장 강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무장현에 설치할 경우 감당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편찬한 호구총수에는 무장현이 동면, 이동면, 동음치면, 원송면, 대제면, 대사면, 장자산동면, 와공면, 심원면, 청해면, 추곡면, 백석면, 성동면, 하룡복면, 상룡복면 등 16면 327개리로 총 3,829호에 27,149명이 살았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세력이 컷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기포는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관할지역인 동음치면 구수네(현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동학교도 및 농민 등 4천명이 모여 외세배척, 탐관오리 척결, 보국안민을 외치며 ‘동학농민혁명’을 기포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구수네를 출발한 동학농민혁명군들은 무장읍성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무혈입성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4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석방하였다. 3일간 무장현에 머물면서 휴식과 훈련 등 전열을 정비한 후 아산면 독곡, 흥덕면 사포를 거쳐 백산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무장객사에 동학농민혁명군은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서 운영하였다. 집강소는 점령지 군현에 대한 계속적인 장악과 민정(民政)을 처리하려고 접주나 접사를 둔 데서 비롯되었다. 집강소 체제는 1894년 7월 초 전봉준(全琫準)과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이 협력하여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고 군현 단위에 집강소를 두기로 한 관민상화책(官民相和策)에 합의함으로써 전면화 되었다. 호남 대부분의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운영 하였다.
무장읍성 내 객사 좌측에는 즐비한 비석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현감비가 대부분이나 그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비의 의미가 크다. 이 비는 유한의사추모비(有韓義士追慕碑)로 무장현 관내 일광 정시해, 강제 오장환, 참봉 김재화, 입신제 유경구 등 4명의 의사에 대한 구국과 독립운동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추모비이다.
일광 정시해(1872∽1906)는 성송면 하고리 태생으로 기우만, 최익현 문하에서 수학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남지역 지사들을 규합하고, 1906년 4월 20일 순창전투에서 최익현 의병장의 중군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강제 오장환(1863∽1909)은 아산면 남산리 태생으로 기삼연, 전해산 등과 장성, 고창,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1907∽1909년 고창, 장성, 영광, 부안 등지에서 10회 이상 일본군과 교전하며 성과를 올렸다.
참봉 김재화(1878∽1908)는 상하면 송곡리 태생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1908년 2월 기병하여 영광, 장성, 정읍, 부안 등지에서 왜군과 싸우다 동년 9월 26일 부안군 청련사 총연암에서 순국하였다.
입신제 유경구(1873∽1919)는 해리면 송산 태생으로 간재 전우 문하에서 활동하였다. 과거제도 불신으로 성리학에 몰두하다 고종이 참혹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다 1919년 1월 사망하였다.
일제와 항쟁하며 독립하고자 1919년 전개한 3.1운동 당시 무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었다. 김영완으로부터 시작한 만세운동은 마을 유지인 이용욱, 김용표, 김상수,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3월 15일 무장읍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단행함으로서 대한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무장은 고창군 정치, 행정, 경제, 교육, 군사, 문화 등의 중심지였다. 또한 성내리는 조상의 얼과 숨결, 서민의 애환을 간직한 마을로 그 뜻을 길이길이 보전해야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재길 시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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