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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를 호령하는 호연지기의 기상 “봉황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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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자연과 조화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고려시대 목조건물,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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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8월 24일(화) 16:58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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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부석사의 보물>
▲ 국보 무량수전 앞 석등
▲ 국보 무량수전
▲ 국보 조사당
▲ 국보 소조여래좌상
▲ 국보 조사당 벽화
▲ 보물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
▲ 보물 삼층석탑
▲ 보물 당간지주
▲ 보물 고려목판
▲ 보물 오불회 괘불탱
▲ 보물 석조석가여래좌상
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산하를 호령하는 호연지기의 기상 “봉황산 부석사”
장엄한 자연과 조화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고려시대 목조건물, 무량수전
가장 아름다운 절집 무량수전은 많은 작품이 탄생하는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구절처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녁 예불 범종소리에 눈시울 젖은 붉은 노을과 카타르시스의 공감을 나누어야 비로소 부석사의 진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부석사의 중심 불전이며 국보로 지정된 무량수전은 몇 개 남지 않은 고려 시대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고려 시대 불전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형태와 비례 등에 있어서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준다. 1376년 중수하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고려 중기 13세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량수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건물 외벽을 이루는 16개의 기둥뿐 아니라 불전 내부의 8개의 기둥까지 모든 기둥이 배흘림기둥이며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둔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잘 지어진 다포식 건물이 화려한 미인 같은 느낌이라면 주심포의 무량수전은 고귀한 혈통의 우아한 귀부인 같은 품격을 지녔다. 시원스레 거리를 둔 높고 우람한 기둥은 배흘림의 곡선으로 부드럽고 편안하다.
무량수전에 대한 전문가들의 설명은 우리나라 목조 건축양식의 여러 기법에 대한 종합 선물 세트 같다. 그중 배흘림기둥이 많이 알려진 용어이고 안쏠림, 귀솟음, 안허리곡, 앙곡 등 생소한 용어들도 등장한다. 유독 부석사 무량수전의 건축 기법을 사례로 드는 것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그러한 건축 기법이 가장 최적화된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눈, 코, 입, 귀가 있지만 유독 미인의 얼굴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아랫부분 삼분의 일 지점이 항아리처럼 볼록하게 배가 나온 기둥으로 360번의 먹줄을 쳐야 할 만큼 세심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수반된다. 인간의 눈은, 기둥의 위아래 지름이 같으면 기둥의 중간 부분이 가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배흘림기둥은 이러한 착시현상을 보정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과 안정감을 준다.
오금기법이라고도 하는 안쏠림은 기둥을 세울 때 건물의 중심을 향해 안쪽으로 기울게 세우는 기법으로 상부의 하중이 밖으로 향하는 것을 막아 건물을 단단하게 유지되도록 하며 건물에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귀솟음은 건물의 중앙 기둥보다 양쪽의 기둥들의 키를 높여 네 귀에 세워지는 기둥을 조금 높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건물 전체가 양쪽으로 쳐져 보이게 되어 답답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앙곡은 처마의 양쪽 끝이 올라가도록 한 지붕선을 말하고 안허리곡은 지붕 사면의 모서리 쪽이 길게 나가면서 곡선을 이룬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법에 의해 버선코처럼 살짝 들어 올려진 경쾌한 처마 곡선이 그려진다.
신체 비율이 좋은 사람을 보면 안정적이고 아름다워 눈이 시원해지듯, 무량수전은 그렇게 잘생긴 건물이다.
더욱이 무량수전이 자리한 곳은 해발고도 819m의 봉황산으로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하지만, 태백산의 한 자락이다. 봉황산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산세가 봉황을 닮은 곳으로 풍수지리적 명당이다.
봉황산에 자리 잡은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 서면 파도처럼 굽이치는 소백산맥 등성이를 눈 아래 굽어보며 산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 같은 호연지기로 가슴 벅차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장엄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는 인간의 빼어난 창작물이다.
무량수전은 다른 불전과는 다르게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앞뒤로 창과 문을 내었다. 남향인 건물에 동향으로 불단을 배치한 것과 관계 깊은 건축적 구조로 보인다. 보통의 불전들은 건물 중심에 같은 방향으로 불상을 배치하고 중앙의 어간문과 별도로 건물 양쪽에 측문을 만들어서 일반인이 드나드는 구조이다. 이와 달리, 무량수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불상은 동향이며 남북으로 문이 있고 동서 양쪽은 벽으로 마감하였다.
원래 내부 바닥은 녹유전이라는, 유약을 바른 전돌이었다고 한다. 이는 무량수전에 모신 부처가 아미타불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부처이고 극락세계는 바닥이 유리라는 불경의 내용을 반영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현재 무량수전 내부에서는 전돌바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조사당이나 자인당 등에서는 전돌 위에 마루를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 내부, 화려한 닫집 아래 모셔진 소조여래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조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기법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불상의 높이는 278cm로 옷주름의 형태로 보아 고려 초기 불상과 같은 계열이다. 불상의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의 수인인 항마촉지인이지만, 무량수전에 모신 부처이고 부석사 원융국사탑비 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아미타불로 보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 즉 무량수(無量壽)의 부처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며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을 극락보전, 광명보전이라고도 한다.
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 글씨이다. 현판 뒤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이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몽진을 왔을 때 남긴 글씨이다.
불교의 여섯 가지 공양물 중 하나는 등이다. 무량수전 앞에는 부처에게 올린 공양물인 석등이 있는데 이 역시 국보이다.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고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평가된다. 등(燈) 역할을 하는 화사석의 8각 면 중 4면은 불빛을 내어주는 창으로 만들었고 4면에는 보살상을 새겼는데 살아있는 듯 아름다운 보살상을 새긴 석수(石手)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생각하게 한다. 고개를 갸웃이 하고 공양물을 들지 않은 오른손은 가슴에 얹어, 진심을 전하고자 하는 그 모습은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마음이 녹아내린다. 아마도 딸바보 석수가 애교쟁이 딸아이를 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웠는데 각층 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이다. 지붕돌의 밑면을 5단으로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676년(문무왕 16) 부석사 창건 당시에 세운 것으로 1956년 해체 복원 시 철제탑과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삼층석탑이 일반인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장엄한 전경 때문이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보는 전경도 좋지만, 삼층석탑은 무량수전보다도 높은 지대에 있어서 좀 더 후련한 기분이 든다.
부석사는 신라의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던 해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부석은 ‘떠있는 돌’이라는 의미로,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널리 알려진 원효대사의 해골물 일화 속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다른 스님이 바로 의상대사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는 해골물을 마신 후 모든 진리가 마음에 있음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였지만, 의상은 당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사상을 배웠다.
671년 당의 공격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한 후 부석사를 비롯하여 전국에 10개의 화엄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부석사의 창건과 관련한 선묘의 설화가 전해진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는데 의상을 흠모한 신도의 딸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오기 위해 당을 떠나자 의상의 뱃길을 지키기 위해 용으로 변하기를 기원하였다. 선묘용의 가호로 무사히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불법을 펼칠 터를 찾아다닌 끝에 봉황산 자락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500여 명의 도적 떼가 차지하고 있어 어려움이 있었는데 대사를 지키던 선묘용이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변해 도적떼를 몰아내었다. 이처럼 떠다니는 커다란 바위가 부석사를 창건하도록 하였기에 ‘부석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지금도 무량수전의 서쪽 뒤에 ‘부석’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하며 동쪽 뒤에는 선묘각이 있어 선묘를 기리고 있다.
매표소에서 부석사의 절정, 무량수전에 오르는 길은 걷기 편하게 돌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경사는 갈수록 심해진다. 일주문, 천왕문, 회전문, 범종루, 안양루를 통과하여 위로 오를수록 단을 구성하는 높직한 석축이 경사를 더욱 부추긴다.
부석사의 범종루는 독특한 건물이다. 앞에서 보면 팔작지붕의 옆모습, 뒤에서 보면 맞배지붕의 옆모습이다. 지붕의 형태가 이렇다 보니 옆에서 보면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인사하는 아가씨처럼 보인다. 왈츠가 흐르면 광활한 하늘을 무대 삼아 날아갈 듯 춤을 추기 시작할 것 같다. 간혹 삶이 무거워질 때 경쾌한 스텝을 밟아보자고 부석사는 언제라도 손을 내밀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기획취재가 어느덧 마무리되었다. 우주왕복 여행을 시도하는 시대지만 시간을 정복하지 못한 인간은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문화를 통해 배우고 지혜를 축적한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종교를 초월하여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우리의 살아있는 유산이다. 천년이 넘는 시간의 깊이에서 우러나는 인문학적 관용은 편협함을 탈피하라는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특히, 코로나19로 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고 문화 향유 공간이 많이 축소된 상황에서 산사를 둘러싼 자연의 대범함과 선조의 위대함을 전하는 문화재는 인간의 짧은 생에 관조적 편안함과 용기를 선물한다.
또한,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뿌리내린 내 고장에 대한 정체성과 애정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총 8회에 걸친 산사의 하모니 기획취재와 함께 해주신 독자 한분한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삶의 고민과 지혜를 함께 나누는 기획취재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 사진 유석영, 조창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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