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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문화 · 역사에 새긴 굵고 선명한 이름, 이기화 전 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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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랑과 헌신, 의지 보여준 평생의 행보(行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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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9일(금) 14:56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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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고창 문화 · 역사에 새긴 굵고 선명한 이름, 이기화 전 문화원장
고향 사랑과 헌신, 의지 보여준 평생의 행보(行步)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했는데 돌이켜보면 무얼 했는지 보람을 느낄 수 없는 날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니 적어도 흐뭇한 일 한 가지쯤 생각난다면 괜찮은 하루를 보낸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고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일 것이다.
이기화(86) 전 문화원장은 고창문화의 역사에 굵고 선명한 이름을 새겼다. 그 중심이 되었던 고창문화원은 그의 손에서 탄생하여 오랫동안 그의 손으로 운영되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오래전부터 있던 문화원이려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당시 고창에 문화원을 만든 일은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를 처음 개척한 일이다. 누군가 시작한 일을 수정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쉬워도 맨바닥에서 처음 시작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모든 선구자는 그 자체로 위대하다.
1963년 28살의 청년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고창문화와 역사에 대한 사명감을 안고 고창문화원을 개원하였다. 광주 미국공보원의 고창 공보원으로서 16mm 영사기를 메고 고창 구석구석을 누비며 동네 모정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반공강연을 한 것이 발판이 되었다.
고창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발품을 팔면서 186개 성씨를 정리하고 모양성의 연대를 규명하였으며 오거리 당산제를 발굴하였다. 또한, 정읍 사람으로 알려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역사를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전봉준 장군의 고향을 바로잡기 위해 그가 바친 26년간에 걸친 고증 작업은 고창에 대한 사랑과 의지, 헌신을 느끼게 한다. 천주교 신자, 레오로서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에도 애정이 깊었던 그는, 고창 최초의 순교자 최여겸의 사적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공음면 석교리 개갑 장터에서 참수형에 처해진 최여겸의 순교지는 2004년 6월 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다.
2008년 문화원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고창지역학연구소를 열고 고창에 대한 연구를 이어왔다.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북협의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과 전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고창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굵직한 기록 이외에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천막 교실을 열어 가르쳤던 일, 농번기에 바쁜 농민들이 안심하고 일하도록 탁아소를 만들어 봉사했던 일, 예식장을 만들어 2천 쌍의 결혼을 주선하고 무상으로 주례를 섰던 일 등 고향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어린 행보는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이 드러나 1973년 ‘제1회 살아있는 인간상록수상’을 수상하였다.
고창향토역사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이기화 전 문화원장은 청소년기 때부터 문학에 깊이 빠진 문학도였다. 중학생 때 김영랑 시인과 동문수학한 이숙(姨叔) 덕에 김영랑 시인에게 문학수업을 받고 금랑(錦郞)이라는 호도 얻었다. 13살 중학생이 여름방학 때 놀러가는 것도 아닌, 문학수업을 받는다고 들뜨는 일은 보통의 중학생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남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추어야 한다”며 웅변 과외를 받게 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집안 곳곳에 인문학적 정서를 심었을 것이다.
고창의 역사를 고증한 한자 실력은 이렇게 어머니의 교육열로 다져졌다. 어린 시절부터 익힌 천자문은 한때 밥벌이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1954년도에 이리 농대에 진학하여 교무실 청소를 하는 등 고학(苦學)을 하였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한자를 잘 쓰느냐고 물어서 “천자문은 떼었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때부터 새로운 일거리를 얻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인쇄를 하려면 원지를 철필로 긁어서 롤러로 미는 방식으로 등사를 하였는데 원지 한 장을 긁어주면 100환을 벌 수 있었다. 100환이면 5일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창의 역사를 밝히고 알려 군민들이 바른 정체감을 가지도록 일생을 바쳐 온 이기화 전 문화원장은 망구((望九)의 나이에 접어든 2016년, 임진왜란 이전의 전통지명 100곳을 골라 담은 향토대서사시 ‘고창’을 펴내며,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오랜 시간의 결실을 이루었다. 그는 고창의 토박이땅이름이 소리나 뜻으로 한자식 표기를 하면서 고유성과 순수성을 잃고 엉뚱하게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일이 안타까웠다. 고창의 전래 지명의 유래를 장편 이야기 형식의 서사시로 전한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영 고향땅 향토적 가치의 맥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걸어다니는 고창박물관이지만, 요즘 그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몸과 타협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몸의 구속에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한 그의 관심은 오직 고창의 역사와 문화인 듯, “고향의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줄 것”을 당부한다. 유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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