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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이치를 중시하며 도(道)를 실천한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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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3월의 인물 동오 조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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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3월 21일(월) 15:14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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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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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유학자로서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은 도(道)를 배양하면서 하늘의 이치 곧 천리(天理)를 중시하는 처사의 삶을 지향하였다. 그가 독서인으로서 지향한 삶은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편안히 천리를 행하여 올바른 도로 돌아간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그가 이치를 궁구하면서도 ‘정성[誠]과 신실함[信]’이란 내면적 자각을 통해 천리를 실현하려는 학적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의 처사적 삶은 이치를 중시하는 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조의곤이 16세 때부터 지근에서 스승의 어록을 기록한 강상차록(江上箚錄)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조의곤은 사후, 스승 기정진이 배향된 장성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 동오유고는 6권 2책으로 1899년에 편집, 간행되었다.
2. 처사로서의 삶과 학문 교류
조의곤은 1832년 전북 고창군 검암리(儉巖里: 현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사홍(士弘), 호는 동오(東塢)이다. 부친은 조현위(曺炫瑋), 모친은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고창과 인연한 선조는 조침(曺琛: 1487〜?)으로 인천 학산(鶴山)에서 태어난 조침은 사위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816〜1586)의 권유로 석정리(石汀里)로 옮겨 정착하니 고창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석정을 비롯한 인근 마을로 옮겨 세거하기에 이르렀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총명한 조의곤은 효도하고 우애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10세 때 오천(鰲川) 고제만(高濟萬: ?〜1881)에게 수학하였다. 스승은 제자가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공부할 것을 번거롭게 독려하지 않았고 그의 행동거지가 자중하여 때에 알맞은 도리를 지켰다고 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섞여 놀이할 적에는 의젓한 대인(大人)의 기상이 있기에 스승은 애중하게 여겨 돌맹이 가운데 옥(玉)과 같다고 하여, 어렸을 때의 이름을 석(石)이라고 불렀다.
조의곤은 16세 때(1847년) 장성에서 강학하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고창의 영취산(靈鷲山)이 장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의 스승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춘추의리를 계승하며 리(理) 중시적 학문를 창도하고 벽사(闢邪)에 임하였다. 조의곤 역시 스승의 학적 태도를 따르면서도 부모 모시기를 극진하게 하였다. 스승이 삶을 마감하는 1879년까지 33년 동안 학문을 익히면서 여러 서책의 은미한 뜻을 힘써 고구하였다. 그의 아들 조석휴(曺錫休: 1852〜1922)는 「가장(家藏)」을 지어 아버지의 행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자기를 위하는 공부만 닦았다. 경서와 제자백가서를 널리 고찰하여 깊이 완미하고 지극히 연역하며 성현을 독실하게 믿고 그 의리를 강마하였다. 무릇 선생께서 가르쳐주시며 고사(古事)를 말한 것과 책을 보며 마음에서 이회하였던 어구들은 모두 차기(箚記)로 만들어 말하기를 “총명은 둔한 붓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쌓여서 책이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의로움을 봄이 정밀하면서 깊고, 이치를 분석함이 분명하였으며, 청빈하며 담박한 생활에도 애써 공부하여, 넓고 바르며 은미하고 정밀한 것이 모두 이 책에 실렸는데 그 강건정대(剛健正大)와 순근화후(諄謹和厚)의 전체를 또한 곁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조의곤은 기정진에게 수학하면서부터 과거공부보다는 성현을 독실하게 믿고 의리를 추구하면서, 학문의 요체를 궁구하여 자기 몸으로 돌이켰으며, 자신의 사사로운 주장을 버리고 타인의 장점을 따르면서도 항상 자기 존재를 인식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훗날 스승의 고족제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총명은 둔한 붓만 못하다”는 격언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 16세부터 스승에게 보고 들은 언행과 가르침, 옛 고사에 대한 담론, 그리고 자신이 책을 보며 깨달은 내용을 수시로 기록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 기록이 바로 강상차록으로 총 75조목이다.
조의곤의 어렸을 적 이름은 “석(石)”이다. 단단한 돌이 옥(玉)을 품고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개명한 ‘의곤(毅坤)’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성격이 부드러움이 많고 굳셈이 부족함을 느껴 “의(毅)”로 바꾸면서도 자신의 부드러운 성향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땅을 상징하는 ‘곤(坤)’을 사용한 듯하다.
조의곤은 광산김씨 김문순(金文珣)의 딸과 혼인한 이후, 21세 때(1852년) 아들 석휴(錫休)를 보았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동쪽 언덕에 초가 몇 칸짜리를 짓고 살면서 “동오(東塢)”라는 편액을 걸었다. 스승 기정진은 제자가 옮겨간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미리 「동오기(東塢記)」를 지어 주었는데, 스승은 동쪽의 ‘동(東)’을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기를 희구하며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자기 주체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고 주간(主幹)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그는 불혹의 나이 끝자락에 시 한수를 지어 스승에게 보낸다. 팔순의 스승은 그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냈다.
七十三年逐水流 칠십삼 년 물 흘러가는 대로 갔는데
餘生一似步竿頭 남은 생애 한결같이 백척간두 걷는 듯
無聞聖訓君休怕 무문이란 성인의 가르침 그댄 두려워 말고
勤把新春贖舊秋 근면히 새봄으로 지난날 보상하길
시의 내용은 자신의 긴 세월을 겪은 삶을 비추면서도 공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더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후생가외(後生可畏)의 소리가 있도록 간절하게 독려하고 있다. 스승의 바람에 힘입어 학문에 매진하던 조의곤은 비바람을 견디던 동오정이 무너져 내리자, 동오정을 새롭게 단장하고 스승의 글에 견주어 기문을 지었다.
조의곤은, 동오정을 지은 것은 곧 태만한 마음을 다스리고 참다운 이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지 그저 자연을 벗삼아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스승이 명명한 ‘동오’의 의미를 받들겠다는 의지가 표현하였다. 조의곤은 새로이 꾸민 동오정을 주제로 시 한수를 지어 강상(江上)의 여러 벗들에게 보낸다.
水石東岡正侈奢 물과 돌, 동쪽 산등성 정히 사치스러우니
如今最恨故人遐 오늘에야 벗들이 멀어질까 가장 한스러우네
他日相尋方丈下 다른 날 방장산 아래 서로 찾을 적에
竹林缺處是吾家 대나무 숲 빈 곳 우리 집이라네
시에 의하면, 방장산 자락의 자연을 감싼 동오정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워, 벗들이 오히려 사치스럽게 여겨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용이다. 그래도 조의곤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처사적 삶을 알아주는 지인들이 찾아올 것으로 예견하며 “대나무 숲 빈 곳 우리 집이라네”라고 하였다. 또다시 벗님들을 기다리며 어느 날 동오정의 가을철 풍경을 한시 한 수를 지었다.
飮我淸泉陟我岡 우리 맑은 샘물 마시며 산등성 오르니
山中逸樂較誰長 산 속 숨은 즐거움 누가 길 것인가 따져보겠나
童收落葉還籬外 아이 낙엽 거두어 울타리 밖으로 돌려보내고
客飽寒花宿月傍 손님 국화꽃 흡족히 여기며 달 곁에 머무는구나
千古良朋時對籍 천고의 어진 벗은 때로 서적 대하는 것이고
十年活計晩栽桑 천년의 살림살이는 늦게나마 뽕나무 심는 것이로구나
家人休說田無穫 집안사람들 밭에 수확할 것 없다고 말하지 마오
秋熟園林果蓏香 가을철 풍년으로 동산 숲속 과일과 열매 향기롭구나
그의 동문 가운데 시와 학문이 뛰어난 경상도 진주 출신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는 동오정에서 유유자적한 처사적 삶을 추구하고 있는 조의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조의곤의 시를 차운하여 동오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었다.
有亭迢遞半登岡 멀리 반등산 산등성이엔 누정 있는데
月戶風欞意味長 달 비친 문과 바람 부는 난간엔 의미심장하구나
植杖觀魚方沼畔 네모진 연못 둑에서 지팡이 짚고 물고기를 관찰하고
岸巾聽鳥黝林傍 검푸른 숲속 곁에서 두건 젖히고 새소리 듣는구나
千秋尙友看書史 천추의 세월 벗 숭상하며 책과 역사 보고
數畝生涯付柘桑 몇 밭이랑의 생활은 산뽕나무와 뽕나무에 붙였구나
醉後撫琴還自樂 술 취한 뒤 거문고 어루만지며 도리어 스스로 즐거워하노니
滿庭花果日呈香 뜰에 가득한 꽃과 과일 날마다 향기 뽐내는구나
조의곤은 동오정에서 오로지 처사적 삶을 일관하며 학인들과 교류하였다. 동문으로는 장흥 출신의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1804∼1889), 고창 노동마을의 농아(聾啞) 박종구(朴鍾九: 1829∼1918), 순창 출신의 삼석(三石) 기기진(奇麒鎭: 1830∼1903), 경상도 합천 삼가(三嘉) 출신의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0∼1911), 나주 출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0∼1931) 등이 있고, 지인으로는 오산후학(鰲山後學) 김수익(金秀益), 송은(松隱) 한진석(韓晋錫: 1833∼1909), 광산(光山) 이윤응(李崙應) 등이 있다. 이들은 동오정을 찾아서 조의곤이 지은 「동오원운(東塢原韻)」에 차운하여 시를 남겼다.
3. 하늘의 이치 중시와 도를 향하는 孝悌忠恕 실천
조의곤은 주역의 원리와 성리학을 담론하면서 하늘의 이치를 중시한다. 그가 “솔개가 날고 물고기 뛰는 것은 각각 그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니 천리(天理)의 유행이면서 도체(道體)의 스스로 그러함이 아닌 것이 없다. 누가 그것을 그렇게 시켰겠는가? 그러나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은 어찌 일찍이 이러한 도리가 없었겠는가?”라고 한 내용을 음미하면, 원리[理]와 현상[기]이 분리되지 않은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그 현상 이면에는 궁극적 하늘의 이치가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 본성을 마음의 생리(生理: 살아가는 원리)로, 감정을 생리의 발현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순수성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자세가 있었기에 만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궁리(窮理)를 즐겼다. 그가 궁구한 이치는 천리와 지리의 대비적 측면에서 개진한다. 여기서 ‘천리’는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따라야 한다는 도덕적 상위 명제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로서의 이치이다. 지리는 산천의 형세에 따른 땅의 이치, 곧 땅의 생기를 감응받아 피흉발복(避凶發福)의 진혈을 찾는 원리이다. 천리와 지리의 상관성은 바로 ‘정성[誠]과 신실함[信]’의 전제에 의한 것이다. 자신이 타고난 ‘정성과 신실함’의 내면적 자각의 구현을 통해 당위성이라는 궁극적 하늘의 이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자세는 과거 공부보다는 실천 공부로 이어졌다. 문장을 여사로 여긴 조의곤은 실천에 앞서 궁리와 함양 공부에 힘썼다. 궁리는 독서가 근간이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독서할 적에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록하고 암송하는 것만 힘쓰니 비록 만권을 읽는다 한들 내 몸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당시 독서 풍조를 비판하였다. 입으로 글만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여 체득하지 못한다면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라는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의 병통이 있게 되어 어떤 효과도 없다. 때문에 조의곤은 “독서의 법은 먼저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적게 하며 과정을 엄격하게 세워서 한 곳의 문장의 의미를 간파하여야 한다. 말뜻이 분명해지고 취지나 의미가 무젖도록 하여 한 터럭만큼의 잡념이 그 사이를 난잡하게 할 수 없는 연후에야 그 효과를 요구하고 그 나아감을 바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독서법은 조금도 잡념이 없는 마음가짐을 통해 글 내용의 뜻을 체득하는 것이다. 도의 체득을 중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선비의 처세는 진실로 능히 나의 도를 다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썩지 않고 영원한 명성이 멀리 전하도록 할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쉽게 말하겠는가? 그 도를 능히 닦지 못하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다면 장수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선비의 의연한 자세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라는 것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공자의 성언(聖言)으로, 도를 탐구하는 공자의 절실한 표현이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겠지만, 공자는 인간이 살아가며 도를 깨쳐서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주체적 노력과 정밀한 사색이 없다면 도를 터득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도를 닦지 못하고 장수한들 어떤 이익도 없다”는 말로 끝맺은 것은 도의 주체적 내재화, 곧 도를 향한 자아의식을 확립하여 일상에서의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는 수신을 향한 군자의 행동과 학문은 먼저 정적 마음을 통해 동적 마음의 올바름을 강조하였다.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맑게 하고 천리를 체인하는 자세”가 바로 정적 마음자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에는 스스로 찾아서 행동하는 주체적 자율성이 깃든 것이다. 도를 올바르게 향하려는 실천적 자세는 후학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격언을 청하니 조의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는 효(孝)와 제(悌)일 따름이고, 부자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다. 이것을 버리고 무엇을 구하겠는가?
조의곤은 하늘의 이치 곧 천리를 중시하면서 후손과 문인들에게 효제와 충서를 재인식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내우외환을 겪는 19세기 중후기 사회에서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 풍속을 교화시켜 유교적 사회질서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즉 유학사상에 의거한 시대적 책임을 다하는 양상이라 하겠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가학으로 이어졌고 문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가학을 보면, 아들 조석휴(曺錫休: 1852~1922)는 무우당유고(無憂堂遺稿)가 있고, 손자 조덕승(曺悳承: 1873〜1860)은 흠재문집(欽齋文集)이 있으며, 증손 조병열(曺秉烈: 1911〜1955)은 조선역사(朝鮮歷史)가 있다. 그의 문인은 연원록에 수록된 인물이 29명에 이른다. 문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경승(曺敬承: 1848~?, 昌寧人, 자는 德賢, 호는 栗亭) 조병일(曺秉馹: 1849~?, 昌寧人, 자는 德裕, 호는 方樵) 조석휴(曺錫休: 1852~1922, 昌寧人, 자는 而敬, 호는 無憂堂) 조용곤(曺鎔坤: 1856∼?, 昌寧人, 자는 甫敬, 호는 儉軒) 조경곤(曺景坤: 1857∼?, 昌寧人, 자는 正彬, 호는 儉圃) 유윤석(柳允錫: 1863∼?, 高興人, 자는 善慶, 호는 春齋) 조홍승(曺洪承: 1867∼?, 昌寧人, 자는 文用, 호는 方巖) 김한묵(金翰默: 1867∼?, 安東人, 자는 允天, 호는 晦山) 조석일(曺錫一: 1868∼?, 昌寧人, 자는 學敬, 호는 梧巖) 정경원(鄭警源: 1871∼?, 晉州人, 자는 啓明, 호는 後松) 김준묵(金峻默: 1872∼?, 安東人, 자는 穉德, 호는 希齋) 변종혁(卞鍾爀: 1873∼1947, 草溪人, 자는 晦叔, 호는 尼山) 조덕승(曺悳承: 1873∼1960, 昌寧人, 자는 伯據, 호는 欽齋) 강태영(姜泰永: 1873~?, 晉州人, 자는 公魯, 호는 栢軒) 정휴철(鄭休哲: 1874~?, 晉州人, 자는 元明, 호는 東臯) 변종원(卞鍾瑗: 1876~?, 草溪人, 자는 仲述, 호는 慕巖) 조병직(曺秉直: 1876~?, 昌寧人, 자는 公裕, 호는 龍齋) 조병의(曺秉宜: 1876∼?, 昌寧人, 자는 仁夫, 호는 方軒) 임기만(林基萬: 1878∼1962, 平澤人, 자는 定一, 호는 愚軒) 조석균(曺錫勻: 1878∼?, 昌寧人, 자는 允平, 호는 東巖) 조광승(曺匡承: 1878~? 자는 文伯, 호는 秋水軒. 정읍) 이인녕(李璘寧: 1879∼?, 延安人, 자는 文敬, 호는 水村) 이종덕(李鍾悳: 1879∼?, 驪州人, 자는 允明, 호는 愚山) 서우식(徐愚植: 1881∼?, 利川人, 자는 子明, 호는 東山) 조석영(曺錫永: 1881∼?, 昌寧人, 자는 景類, 호는 訥軒) 이공우(李孔雨: 1882∼?, 慶州人, 자는 肅卿, 호는 愼庵) 김영기(金永基: 1852∼?, 海豊人, 자는 仁三) 조풍곤(曺豊坤: 1851∼?, 昌寧人, 자는 炳三, 호는 斗峯) 조국승(曺國承: ?∼?, 昌寧人, 자는 觀謙, 호는 星齋)
자료제공 이형성(전남대학교 학술교수)
< 사진 및 자료 정리 고창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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