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미당 시문학관을 찾았다.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 건물를 개보수하여 2001년 10월 미당 서정주 선생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작품과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미당 시문학관이다. 외모는 동유럽의 해묵은 골목에서나 느끼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다. 담장에는 <항상 사랑스러운> 꽃말을 간직한 “유홍초”가 유독 짙은 빨강으로 눈이 부신다. 참 개구리의 운동장 만큼의 잔디밭에는 늦여름을 대변하는 듯, 소나기가 오려나 고추 잠자리가 낮게 날아 다닌다..
“질마재의 신화” 시집을 탄생시킨 이곳은 미당의 고향이자. 생가와 외가와 묘지와 시문학관이 한 곳에 어울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마을이다. 소요산을 등에 업고, 어린시절 교통 수단이었을 좌치 나루터를 품에 안고 있어 연중 방문객이 이어지면서 매우 뜻깊은 문학관으로 누구나 한번쯤 가볼만한 곳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미당 서정주가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다섯 차례 추천되기도 했었다. 미당이 이 세상을 떠난 한국 문학의 빈자리는 가슴이 시리도록 크다. 그의 서정시는 우리말 아름다움의 대표였고 미당의 노래가 있었기에 더욱 빛났다. 선운사의 푸르름 향기와 구수한 맛이 흘러내리는 땅, 좌치 나루터의 갯내음이 엄마의 젖냄새처럼 야릇한 매력이 있어 찾는 이들을 붙잡아 놓게한다.
3개의 전시동에는 미당의 아우인 서정태 시인과 후손들이 4,052점의 유품을 기증하여 유품관, 작품전시관, 세미나실, 관리실 및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으며, 육필원고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 자료와 운보 김기창 화백과 조병완 화백의 미당 초상화, 평소에 쓰던 사소한 물품을 비롯하여 각종 서적 등 1만 5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노년에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새벽마다 세계의 산 1,624개와 각 나라의 수도 이름을 암송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5층 전망대로 올라가는 복도 측면에 암기했던 산 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사진 속 필체는 미당의 친필이다. 건물의 꼭대기 전망대는 '바람의 전망대'로 명명되어 있다. 사면이 자연을 품고 있다. 부부의 묘소는 손에 닿을 듯하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듯 격동의 세월 속에서 2000년 12월 24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왔다.
“나에게 친일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본인 스스로 친일 시인이라 인정했듯.
일제 강점기 친일 및 반인륜 행적과 신군부 치하에서의 처신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그 시대에 먹고살기 위해 변절했을까? 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변절했을까? 이렇듯, 전망대 4층에 미당의 친일 시들만을 골라 전시해놓았다. 행실에 대해 변명을 하려 하는 뉘앙스밖에 받지 못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끄러운 시들을 따로 전시해 놓았을 줄은 몰랐다. 친일시까지도 한켠에 가감 없이 전시해놓은 독특한 미당 시문학관이다. 파란과 곡절이 많았던 그의 인생에서 70년간 시를 쓰고, 시집 15권에 발표된 시만 1천편이 넘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타계 직후인 2001년 ‘미당문학상’이 제정되면서 매서운 비판이 일기 시작해 문단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훌륭한 시인인가, 친일 매국노인가? 시인 김상일은 “우리가 미당 시를 읽는 것은 세계 향유의 일환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읽는 것이지 시인 당사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송하선 시인은 이렇게도 말한다. 많은 사람이 미당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미당은 ‘시인이었다’고 대답한다. 문학평론가 홍기삼은 “미당은 한국어가 살아 있는 한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다” 다른 평론가는 “나는 스승을 존중한다, 그러나 스승이 매국노가 되어 내 조국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다면 나는 내 조국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말없는 미당 시문학관은 친일이든. 천재 시인이든 “미당은 시의 귀신입니다”라고 말하며 굳게 버티고 있다.
염영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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