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왜, 고창에서 동학혁명은 일어났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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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 희 석 | ⓒ (주)고창신문 |
조선후기 민중은 극도로 궁핍하여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고 2-3대 조상만 거슬러 올라가면 양반의 가문이라하여 체면을 유지했던 선비 집안도 체면과 도덕을 내팽개치고 노예같이 관리들에게 굴종하며 살았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다. 서구 열강들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만들어 내는 풍부한 물자와 발달한 무기로 봉건 후진국을 침략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몇몇 개화파들이 세상의 변화와 위험을 경고하였으나 임금과 척족, 고위 관료들은 지금 누리는 권세와 부에 만족한 채 현상 변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는 민중을 건져줄 사상(종교)이 필요했다. 혁명을 불러 올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민중들의 봉기 의지는 충만하였지만 지도자가 없으면 의견만 분분하지 실제 봉기는 어렵다. 고창땅 무장현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라는 걸출한 혁명 지도자가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혁명은 발발하였다. 그것이 무장기포다. 19세기 말 조선땅 여기저기서 봉기는 분출하였고 그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갑오년 3월 무장현에서 드디어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장 뜨겁게 봉기는 분출하였다. 왜 고창땅 무장현에서 혁명은 타오른 것인가? 그 원인을 찾아보자.
1. 조선후기 사회환경
(1)극도로 궁핍한 사회, 자유를 포기한 백성들 ( 함석헌 전집에서)
나는 1901년 3월13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황해 바닷가 조그만 농촌에 태어났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때일수록 민중을 건져줄 종교가 필요하건만 그것이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는 유교도 불교도 선도도 있기는 있었으나 모두 굳어진 의식, 비뚤어진 전통뿐이지 산 믿음, 건전한 도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무지와 미신과 가난과 부패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류계급은 지위 권력 지식을 이용 하여 민중을 억누르고 짜먹기만 일삼았고 무지 무력한 민중은 모든 것을 운명, 팔자로 체념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개조해 보려는 의욕은 어디 가도 없었습니다. 불교는 목탁을 들고 동냥을 다니는 중놈으로 표시가 되었고 유교는 고린내나는 상투의 썩어진 선비로 표시되었고, 선도는 산간주막의 요술쟁이로 표시가 되었습니다. 산엣 사람은 호랑이 승냥이 때문에 떨고, 저자 사람은 보다 더 사나운 양반 벼슬아치 때문에 떨었으며, 낮에는 얼굴과 손바닥에 박혀 있는 팔자에 얽매여 우는 백성이요, 밤에는 구석마다 골짜기마다 씨글거리는 귀신에 눌려 떠는 나라였습니다.
(2) 굶주림에 극도로 내몰린 민중, 노예로 내몰린 백성들 자유, 평등 자각 없어
일반 백성들은 매일 매일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민중들은 끼니를 걱정하는 궁핍한 상황에 몰리면 선비의 체면이고, 유가(儒家)의 인륜이고 조상의 제사고 돌아볼 여유가 없다. 3-4대만 벼슬에 나가지 못하면 모두 궁민(窮民)이 되고 잔반(殘班/몰락한 양반)이 된다. 무장기포 동학혁명군의 태반은 궁민이고, 천민이고 잔반도 상당수 있다. 잔반(殘班)중 상당수가 동학군의 지도자들이다. 고창의 지배층은 현감과 세금을 거두는 관리(아전)들이다. 물론 중앙의 왕족이나 고위층과 연결한 끈을 가진 소수의 특권층도 있다.
2.동학(사상)의 급속한 전파
모두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노예같이 사는 사회가 되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들을 건져줄 정신적 지도자를 기다린다. 어느 민족이나 민족 전체가 극심한 고난에 처하면 구세주(메시아)를 기다린다. 조선 말기 우리 민족도 현실에서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헤어날 방도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정신을 구제할 사상가(구세주)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최재우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고 고민하고 천착하였다. 기존의 우리 민족의 사상과 종교, 또 청나라에 들어온 선교사가 전하는 서양의 종교에서 방법을 찾으려고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 결과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나아갈 길을 찾았다, 인내천 시천주의 사상(정신)을 통하여 세상을 구제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라와 임금에게 절망한 민중(백성)들은 최재우의 사상 밑으로 몰려 들었다. 드디어 동학(정신)을 통하여 민중들은 안도(安堵)를 얻게 되었다. 동학은 조선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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