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왜, 고창에서 동학혁명은 일어났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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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 희 석 | ⓒ (주)고창신문 |
3. 걸출한 혁명지도자의 출현
1800년대 조선 60여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대개는 규모가 작고 한 고을에서 봉기하고 한 고을 내에서 싸우다가 곧 진압되었다. 한 고을에서 일어나서 다른 고을까지 넘어가면 봉기는 반란이 된다. 반란자는 역모자가 된다. 역모자는 3족을 죽인다. 그래서 고을을 넘어가는 봉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장에서 기포한 봉기는 인근 수개 군현(郡縣)의 농민군이 가담하였고, 충청도의 농민군도 가담하였다. 그래서 무장기포(茂長기포)는 수개 현의 동학군과 농민군이 합세하여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상당한 규모를 이룬 혁명이 되었다. 그리고 비록 죽창이 주축을 이뤘지만 무기를 갖추었고 조직을 갖춘 무장(武裝) 집단이 되었다. 조선후기 수많은 민란에서 보았듯 목숨을 내놓고 민중을 이끈 지도자는 드물다. 혁명에는 뛰어난 지략과 용기를 갖춘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무장기포에는 걸출한 두 지도자가 탄생했다. 전봉준과 손화중이다
(전봉준/1855-1895) 전봉준은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파다. 본관은 천안 전씨. 1855년 고창군 당촌마을에서 태어나고 유년, 소년시절을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13세 무렵 태인 항새마을로 이사 10리 근처 금구 원평에 사는 김덕명과 교류. 10대 후반 태인 산외면 지금실로 옮겨 살며 김개남과 친분을 쌓았다. 고부 봉기 몇해 전 고부군 이평면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1890년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하고 38세 무렵,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되었다.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는데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고, 종말론 등 유언비어 등이 나돌고 탐관오리 들의 착취가 극에 달하면서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 33세 무렵 손화중과 접촉했다. 손화중과 접촉이후 동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동학이 나라를 구제할 수 있다는 사상을 굳혔다. 그는 한때 1890년 초 잠시 대원군의 식객 노릇을 한 적이 있으며 이 때 청나라등 외세의 조류와 조정의 정세도 파악하게 된다. 대원군과 이런 인연을 갖고 있는 전봉준은 1893년 2월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만나고 “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 라고 말하고 대원군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나 대원군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고부로 돌아와 고창, 정읍, 김제 등 전라도 지역 동학 지도자들을 찾아 다니며 개혁, 봉기 등을 역설하였다. 1894년 1월 갑오년 고부에서 봉기하였으나 준비가 치밀하지 못하였다. 농민군의 참여는 1000 여명의 규모에 그쳤으며, 고부 점령후 다음 단계 진행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었다.
(손화중/1861-1895) 치밀하게 준비하고 숙고하는 신중파다. 본관은 밀양
정읍에서 태어나고 부안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정읍을 거쳐 무장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손화중 대접주는 무장, 정읍, 고창, 부안은 물론 광주, 나주, 장성, 담양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였고, 천민인 광대집단 등 그 포교 대상도 다양하였다. 손화중은 1893년 1월 서울 광화문에서 복합상소가 이루어질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충청북도 보은에서 열린 장내리 집회에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 하는 등 동학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손화중은 조선 후기 봉건정부의 모순에 따른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전봉준과 함께 무장기포(茂長起包)를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손화중은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지역적 민란에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한 고창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 혁명가이다.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동학 농민혁명군의 근간을 이루던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승리로 기록된 전주성을 점령한 주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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