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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년의 낭만, ‘전라도 가이드’ 고위경의 인생 3막

2026년 02월 11일(수) 10:59 [(주)고창신문]

 

인터뷰 – 고위경 선교사



노년의 낭만, ‘전라도 가이드’ 고위경의 인생 3막



ⓒ (주)고창신문



고창 방장산 줄기 아래 자리 잡은 서울시니어스 고창타워. 이곳에는 매주 특별한 ‘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있다. 은퇴 후 고창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한 고령자들이 모인 맛집 탐방 동호회 ‘필그림스(Pilgrims)’다. 이 순례길의 중심에는 무역인으로 세계를 누비고, 러시아에서 17년간 문화 사역을 펼쳤던 고위경(76) 씨가 있다. 13,700페이지라는 방대한 전라도 자료집을 구축하고 직접 운전대를 잡으며 이웃의 노년을 빛나게 만드는 그를 만났다.

■ 무역, 러시아 선교, 그리고 고창
고위경 씨의 삶은 한 편의 대서사시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평생을 무역업에 종사하며 세계 곳곳을 전전했다. 쉴 틈 없이 일하던 그가 ‘보람 있는 노년’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54세 때였다.
“무역으로 성취감은 맛봤지만, 인생의 후반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곧장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 ‘문화교류센터’라는 NGO 단체를 설립했다. 10년 동안 160회의 문화행사를 개최하며 한국의 예술을 알렸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7년간 무료 문화가이드로 봉사했다. 17년의 세월은 그에게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뼈저리게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2020년, 70세가 되던 해 아내와의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를 연고 없던 고창으로 이끌었다. 누님이 살고 계시던 고창의 편안함에 이끌려 정착한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세 번째 사명을 발견했다.

■ 13,700페이지, 전라도의 모든 것을 기록하다
고창타워 입주민 대부분은 미국이나 서울 등 타지에서 온 이들이다. 낯선 전라도 땅에서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따분해하는 이웃들을 보며 고 씨는 결심했다.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모으기로 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부지런히 다녔어요. 전라도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죠. 자료가 없어서 이 아름다운 자연과 맛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그렇게 쌓인 기록이 어느덧 13,700페이지에 달한다. 그중 핵심만 추린 5,300페이지 분량의 자료집에는 맛집 베스트 100, 카페 베스트 100, 관광지 베스트 50, 월별 꽃구경 명소 등이 빼곡히 담겼다. 이 모든 정보는 그가 직접 방문해 검증한 ‘진짜’ 정보다. 그는 이 귀한 자료를 요청하는 이들에게 USB에 담아 기꺼이 나누어준다.

■ “대충 먹는 노년은 없다”
그의 기록은 2023년 ‘필그림스’라는 모임으로 꽃을 피웠다. 현재 6개 그룹, 약 20여 명의 회원이 그와 함께 매주 전라도의 맛과 멋을 탐닉한다.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시간입니다. 노년에는 입맛도 떨어지고 즐거움을 잃기 쉬워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 전부터 식당과 카페 정보를 미리 보냅니다. 사진과 설명을 보며 일주일간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죠. ‘대충 한 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축제로 만드는 겁니다.”
그는 철저한 기획자다. 회원들이 피로하지 않도록 3~4시간 이내의 동선을 설계하고,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도 중복 방문을 피해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경비 또한 정액제로 투명하게 관리해 불필요한 오해를 없앴다. 만약 누군가 특정 메뉴를 못 먹는다고 하면 즉시 장소를 변경할 만큼 세심하게 배려한다.

■ 고창의 숨은 매력을 말하다
고창의 맛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창의 맛집은 아직 공부중이지만 ‘인천가든’의 민물새우탕이나 선운사 장어거리의 ‘유신식당’은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합니다.”
꽃이 없는 겨울철에는 고창의 ‘설경’이 가장 훌륭한 관광상품이 된다. 그는 눈 내린 선운사나 방장산의 비경을 찾아 드라이브를 즐긴다. 또한, 남들이 잘 모르는 전라도의 보석 같은 장소로 영광의 ‘열부순절지’를 꼽았다. 정유재란 당시 절개를 지킨 여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가 깃든 이곳은 6월이면 붉은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절경을 이룬다.
‘카페 아르메리아’와 ‘연다원’ 또한 고창에서 그가 아끼는 장소다. 한적한 카페에서 회원들과 생일 파티를 열며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 봉사로 완성되는 노년의 풍경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직접 운전하며 이웃을 안내하는 일이 고될 법도 하지만, 고 씨는 단호하게 표현했다.
“노년에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이 가장 보람차고 행복합니다. 회원들이 ‘고창에 온 것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할 때 그 뿌듯함은 말로 다 못 하죠.”
그는 최근 ‘헬스에이징 뉴스’라는 매체에 매주 금요일마다 맛집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록이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13,700페이지의 기록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한 노학자가 이웃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초대장이다.
“제 노년의 삶이 사회를 향한 거창한 역할은 아닐지라도, 한결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봉사의 모습으로 남길 바랍니다. 이 자료집이 고창에 사는 분들의 여가생활에 조금이나마 빛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봉사는 영혼을 살찌운다. 고창의 방장산처럼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를 가진 고위경 씨. 그의 운전대는 오늘도 이웃들의 행복을 싣고 전라도의 아름다운 길 위를 달리고 있다.

김민찬 기자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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