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특별기고- 고창향토문화연구소장 이기화
|
|
충의의 명문 무장 김씨
|
|
2001년 08월 28일(화) 17:46 [(주)고창신문] 
|
|
|
충의란 나라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능력으로서 백성들이 지켜내야 할 마땅한 좌표이기도 하다.
우리 고장에는 이와같은 충성과 절의를 지켜낸 성씨들이 많이 있다. 특히 임진·정유 양란의 민족수난을 통해 이 고장에 사는 각 성씨중 한 집안 3종지간에서 17위의 「선무원종공신」을 배출한 일문거의의 기록은 우리 고장을 관향으로 한 무장김씨였다.
무장김씨는 본래 장사(長沙-무장의 옛 이름) 김씨로서 그 시조 선(璇)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56세손이었다. 고려말 공민왕조에 충훈한 공로로 장사군(長沙君)으로 봉해졌는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의식에서 관직을 버리고 무장땅에 낙향, 은둔세거하게 됨에 후손들이 무장을 관적지로 삼은 것이다.
시조(선)의 큰 손자(自珍) 후손은 고창, 옥구, 김제, 정읍등에 살고 둘째 손자(自武)는 마침 사육신의 일원인 박팽년의 사위여서 장인의 피화에 연루되면서 무장을 멀리 떠나 황해도 서단에 있는 장연(長淵)에 은거하게 되어 그 후손들이 강화, 김포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뒷날 어떤 연유에서인지 고창, 김제, 정읍등에 사는 후손들은 다시 김해김씨로 귀관하기도 했다.
시조(선)의 6세손으로 무과 급제한 수연(秀淵)은 여러 지방의 병·수사를 거쳐 임진란을 당하자 아들 천록(天祿)과 종질 응수(應壽), 응창(應昌)을 용만으로 몽진을 떠난 선조왕을 호가하게 하고 자신은 3종질 천복(天福)등 수백의 의병과 가동들을 인솔 금산전투의 고경명 장군을 도왔다. 그리고 장손 위(緯)에겐 군량을 모아 금산전투를 돕게 하였다.
1594년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로 3년상을 마친 그는 정유재란 때 그 노고의 공훈으로 5위도총부의 도총관으로 승진했다가 1599년 향년 5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침에 선무원종공신 3등훈이 되었다.
그의 아들 천록은 해주판관을 지냈는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솔을 고향인 성송면 외원에 데려다 놓고 남원 전투에 참가 순절함에 선무원종공신 2등훈이 되었다.
천록의 아들 훈련원 주부 위는 남원성에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장례를 모신 후 9월에 이순신장군 휘하의 복수의병대 진하장으로 참전 명량대첩에서 아무 현(絢)과 함께 장렬히 전사함에 형제간에 선무원종공신 2등훈이 되었다.
수연의 3종질 천복은 무과로 5위도총부 부장을 지냈다. 임진란을 당하여 3종숙(수연)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다시 고종후(高從厚) 의병장의 복수의병대에 가담 진주성에서 순절하니 선무원종공신 2등훈이 되었다.
이밖에도 천록의 재종제 응수의 선무원종공신 2등훈, 천록의 셋째아들 흔, 천록의 재종제 천수(天壽), 천수의 동생 천우(天佑), 천수의 아들 위(渭), 천수의 조카 치(緻), 작(綽), 정(綎), 수연의 종조부 흡(洽), 흡의 아들 신(信), 천록의 3종손 대봉(大奉)은 선무원종공신 3등훈이요, 천록의 재종제 응수, 응창 형제는 호성공신 3등훈이다.
이와같이 도총관 김수연을 정점으로 하여 당내간의 근친 일문이 거의하여 나라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사례는 여간 드문일이거니와 이들을 배출시킨 무장 김씨야말로 충의의 명문으로 향토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
|
|
|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
|
|
|
|
|
|
|
|
|
|
|
|
|
|
|
!!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는등 법률 및 신문사 약관에 위반되는
글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에
대한 민형사상의 법적인 책임은 게시자에게
있으며 운영자에 의해 삭제되거나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