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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고창읍성 축성연대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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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문화재전문위원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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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01일(금) 17:49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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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남북한을 통틀어 3천여개소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다고 한다. 성은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으로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것은 아니었고 원시적 형태의 목책(木柵)으로 시작했었는데 보다 더 견고하고 항구적인 성곽을 만들기 위하여 토성과 석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 등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런 성곽들은 왕궁이 있는 도성과 군(郡) 현(縣의) 치소(治所)에 있는 읍성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산성 등으로 구분하며 산성은 퇴뫼형과 포곡형으로 분류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평양성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어서 BC 2세기 무렵에는 상당히 발달된 성곽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성곽은 무너져 내리고 읍성이 있었던 지역들은 중소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멸실되어 버리고 고창읍성과 해미읍성·낙안읍성·동래읍성·수원성·진주성 등 9개소만이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볼 수 있을 만큼 남아있다.
그러나 이토록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창읍성(사적145호)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해석이 서로 다른부분들이 있으나 지금까지 나타난 관련문헌과 고증자료는 다음과 같다.
고창읍성은 조선 세종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 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終)이라는 각자가 있다. 또한 동문 옹성 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어서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 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17년(1484)이전의 개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개유소축의 개유년은 1417년 이후의 개유년이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개유(癸酉)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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