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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의 숨결- 무장읍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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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1월 30일(목) 17:49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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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의 역사는 1417년(태종1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병합하여 무장현이라 칭하고 성을 쌓고 고을의 터를 정하면서 580여년간 이어온 무장골로 성이 있는 마을 성내리로 부르게 되었다.
무장은 원래 장사현에 속했는데 고려말 어항가 무역이 활발한 법성포에 왜구의 잦은 침범이 있어 장사고을에까지 그 피해가 극심하여 성을 쌓게 된것이다.
성내(城內)에는 객사뒤에 지금의 느티나무보다 높은 사두봉이 있었으며 소재지 남방에 개구리형국인 남산이 있고, 개구리는 방죽이 있어야 한다해서 연못(지금의 사장터)이 있었다.
현재의 무장읍 성지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그)에서 시작하여 무장초등학교 뒤를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道路)의 왼쪽까지 뻗어 있는 둘레 약 1,400m의 토성이다. 이 안에는 현감이 집무하던 동헌과 객사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행정모습을 엿볼 수 있다.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읍치(邑治)의 안정을 위해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주민과 승려 2만여명을 동원해 4개월만에 축성하였다는 이 토성은 남문인 "진무루"와 함께 지방기념물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조를 보면, 해리로 가는 신작로 개설 작업시 성곽의 일부가 절단되어 노출되었는데, 그 단명을 보면 성곽 내부는 열석(列石)을 쌓았고, 흙으로 잘 다지고 있다. 서편쪽은 2자 길이에 1자 반 내지 1자 되는 판판한 큰 돌들로 쌓고 흙으로 다져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일부 몰지각한 주민들이 이 돌을 캐내어 집 짓는데 초석으로 몰래 캐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성 둘레에는 해자(垓字)가 둘러 파져 있으며, 그 넓은 곳은 12자(3.6m)이고 깊이는 6자(1.8m)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매몰되고 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문화재 관리의 잘못을 알고 그 위에 황토흙을 덮었는데, 황토로 임시 덮어놓은 그 위에다 비닐 건조장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으니 퍽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지방유형 문화재 제34호인 객사(송사관)는 중앙부의 본관이 솟은건물로 궐패(闕牌), 즉 임금을 상징하는 궐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시어 두고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했던 곳이다.
1581년 선조(宣祖)14년 건립되었다 하나 고증이 확실하지 않다.
다만 건립 후 소실됨이 없이 잘 보존돼 있고, 중앙 본당 3칸 좌우 익당(翼唐) 3칸의 맞배지붕이다.
정원이 약 177평이고 2단 석축 위에 조성되었으며, 수목은 중앙 본당을 중심으로 대칭형으로 식재되어 있다. 기하학적으로 잘 조성되어 있으며, 오르내리는 돌계단 등에는 호랑이와 구름 모양 등이 양각되어 있어 고려 왕조의 송도 왕궁의 축소판 같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1911년 국민학교 교실로 사용된 일이 있고, 그 뒤 면사무소로 사용된 일이 있다.
그때에 헐고 유리창을 달고 내부에 시멘트 기둥을 세워 천정을 시설하였었으나, 1990년에 모두 철거하고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동헌(東軒)은 취백당(翠白堂)이라고도 하며 화강암 축대에 정면에 6칸, 측면 4칸 부연을 단 겹처마의 건물로 높이 기단 위에 세워졌다.
대개 여러 고을의 관아 등은 전란(戰亂)이나 재화(災禍)로 소실 도괴되어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볼 수 없으나, 호남지방에서는 나주부(羅州府)의 관아와 무장현의 동헌, 객사만이 유일하게 창건 당시의 건물로 남아 있다.
한편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지상(地上)에서 1m95cm위에 설치되었으며, 루(樓)의 가장자리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축대(築台)는 2m 80cm이다. 중앙 칸은 돌계단의 통로로 되어 있고, 통로 좌우는 석축으로 쌓여 있다.
원래는 단청이 되어있지 않아 누각 안 도리 등에는 1925년 '고혁극단', '청춘좌' 등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활동의 극단 단체들인 유랑극단이 찾아 들어 문예봉 등 당시의 배역진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우리나라 연극사를 증명하는 자취가 남아있었다.
그러기에 삼군 병합(1914)은 되었어도 가장 컸던 옛 고을로서의 영화가 서려 있었는데, 원형을 무시한 단청으로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림은 우리나라 문예활동의 중요한 고증이 퇴락되어 가는 모습과 함께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현존하는 동헌(東軒)과 객사 그리고 진무루(鎭茂樓)외에도 동문지와 서문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주초석(柱礎石)이나 심초석(心礎石)도 발굴상태에 따라 원형의 복원이 가능한 것은 물론 민정을 살피고자 지었다는 찰미루(察眉樓)터와 흉년이 들었을 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 백성들에게 고루 나눠줬다는 빙옥대(氷玉台), 향청(鄕廳), 단묘(壇廟), 성황단(城隍壇)의 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뿐만아니라 내아(內衙), 책실(冊室), 서청(書聽), 형청, 작청, 군기청, 훈련청 등도 옛문헌이나 노인들의 증언에 의해 그 위치가 밝혀져 지난날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건읍(建邑)당시는 호남의 거읍으로 발전하여 건양1년(1896)에 지방제도를 정비할때는 2등군에 끼기도 했으며 일제시대의 부군폐합으로 5등군이었던 고창군에 병합, 퇴로의 일로를 걷게된 무장읍의 성지는 가속화된 개발의 뒷전에 밀려 지방경제의 침체를 면치못해 아직까지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른다.
성내(城內)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두봉에는 수백년의 수령을 가진 노송고목이 울창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흔적이 추정되는 공아관사와 함께 해자(인공연못, 넓이4㎞)의 터가 보존되고 있을 뿐아니라 사직단(社稷壇), 여단지(勵壇址)도 국유지로 남아있어 무장읍지를 사적지로 지정, 보존해 나가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유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유비무환의 표상인 이 토성은 5백70여년동안 보존되는 과정에서 관리의 손이 제대로 닿지않아 일부구간의 높이가 허물어지고 윤곽만 겨우 남은곳이 있는가 하면 형태가 완전히 없어져 통행로로 쓰이고 있는곳이 있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난 91년 무장읍성이 문화사적 제346호로 지정됨에 따라 주민들이 적극적인 보존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이에 군은 2001년도부터 무장읍성 정비사업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사업비 66억8천5백여만원을 투자 2005년까지 5년에 걸친 사업계획으로 학교이전 및 성곽보수, 건물지 발굴조사, 관아건물 복원 등 적극적인 문화재 보존 관리에 나서는 한편 올해는 남문보수, 성곽보수가 이루어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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