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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창사람들의 전통적 기질을 되새기자

고창문화원장 이기화

2003년 05월 01일(목) 17:46 [(주)고창신문]

 

무장객사 앞에 가면 역대 무장현감들의 선정불망비가 즐비하게 서있다. 그 중에 조선조 영조 17년에 부임했던 정권(鄭權)현감 영세불망비의 사연에 담겨져 있는 고창사람의 기질을 엿보기로 하겠다. 무장읍지의 관안 기록을 보면 정권은 1741년 5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4월에 말미를 얻어 수삭동안 자리를 비웠던 일로 순영(巡營)으로부터 파직되었다가 때마침 새로 온 감사가 상감께 아뢰어 그해 9월에 다시 환임 되었는데 소나무 베는 것을 단속하지 않아 직무를 태만한 일로 수영(水營)에서 다시 파직되어 1744년 2월에 떠나 태인에서 잡혀갔다. 문과를 거친 그는 재임 중에 읍지를 편찬하였고 불망비가 세워졌다고 실려 있다.



그런데 불망비의 앞면 병기( 記)에 보면 氷玉居官(빙옥거관), 琴書歸家(금서귀가)라하여 그의 벼슬살이는 얼음과 옥처럼 깨끗하였고 귀가해서는 거문고와 책을 벗하였다고 하여 고고한 선비생활의 단면을 상징해 주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비문에서는 청순한 공직자로 소개되었고 공적인 기록에서는 직무 태만한 공직자로 알려져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물로 깨끗이 씻어놓은 논공행상으로 금석문을 다듬어 놓았다. 더욱이나 이 불망비를 세우기는 그가 떠난지 46년만인 1789년의 정조 13년에 선무랑 김경묵이 쓴 비문으로 되어있다.



이 비를 세운 연유야 지금와서 밝혀질 수야 없겠으나 근 50년후에 세운 불망비를 보면 어떤 압력 하에서 였던지간에 아니 세울 수 없었던 상황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여기에서 음미해 볼때 이 비의 형태를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선정비와는 달리 귀부 농대위에 4자비신을 세우고 두전없이 표제와 음기가 새겨있고 머리는 이수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표제는 규액과 병기로 구분되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귀부 농대의 귀두를 앙면정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仰首伸眉로(앙수신미) 비신을 역시하고 있는 모습으로서 대대로 화제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그 당시 비를 다듬는 석공이야 천민으로서 시키는 대로 할뿐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입장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만 46년 후에 부임해온 현감의 지시에 의해 불망비를 세워주어야 할 육방관속의 아전들이 짜고 귀두를 돌려놓았다는 고로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 해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석공들의 배짱이야 여기에 미칠 수 없고 그 당시의 루머로 무장현감으로 발령이 나면 그동안 공 드린 본전 생각이 나서 「아이고 나 죽었고나」하는 탄식이 앞서게 되어 재빨리 빠져나갈 궁리 때문에 치세는 건성이 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고장과는 판이해서 예로부터 무장고을에는 고려시대에 화려했었던 토반들의 후예들이 임진난리 이후에 빈곤을 덜기 위한 방편으로 중인계급인 지방아전을 자청하여 짜고 치는 고스톱 모양으로 육방관속을 맡아 현감들을 헛바퀴 채우는 습속이 생겨 아주 출중한 현감을 제외하고는 왼만한 현감들이야 쪽을 못쓰고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국이 돌아감에 고을에 사는 부자들이 서둘러 아전들을 먹여 살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텃새 짙은 유습의 연속으로 인해 무장지역에 가면 음식문화가 고도화되어 지금도 밑반찬이 매우 좋은 것을 음미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이나 서민대중들이 살기좋은 고장으로 소문나 원근에서 안락한 고장으로 찾는 이들이 많게 되었고 놀이문화도 풍성하게 그 맥을 이어 오게 되어 판소리, 가곡가사, 시조, 풍물의 요람지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가 조성 된 것도 결코 무리수가 아니라 순리의 풍조가 이루어진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숱하게 많은 난리 앞에 풍전등화의 보편적인 기질의 표출이 상식화되었으나 우리고장은 예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유명하게 되어 선사시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을 찾아들곤 하였다.



역사적으로도 유배족들이 즐겨찾던 낙원지로서 민족사의 요람기였던 고려가 망한 이후 우리고장에는 새로운 인맥권이 형성하게 되어 유배문화가 풍성하게 되었고, 선비족들의 조용한 은거지로 알려지게 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천혜조건이 좋아 특히 가난한 선비족들의 은신처로 안성맞춤이 되어 이곳에 묻히면 떠날줄을 몰랐다. 오히려 이곳을 지켜낼 양으로 난리가 몰아오면 삼십육계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력의 발로로 이 고장을 고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됨에 정의를 숭상하는 풍조가 드세게 되어 의향 고창을 정립한 것이다.



「고창사람들은 의를 숭상하는 세차고 강직한 선비의식의 바탕위에서 국난의 위기를 당하여서는 초연이나 은둔이 아니라 과감히 박차고 일어나 구국의 선봉에서서 살신성인의 숭고한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또한 자주의식과 주체성이 남달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크게 결집되어 그 응집력은 항상 민족정신의 저력으로 표출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유의 기질이 우리고장을 지탱해주었고 의향의 맥락은 농민혁명이후 폭넓은 의병항쟁을 낳았고 민족교육의 요람인 고창고보를 군민대회를 열어 십시일반으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정치적 성향은 의향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 유수한 야당의 고작을 지켜낸 곳인데 지금은 어찌된일인가 모두가 여당으로 야당부재현상의 꽉막힌 고장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또한 요사이는 우리고장이 핵 폐기장 설치장소로 부각되어 다른 후보지에서는 그 일치성으로 보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찬성반대의 각축장이 되어 이전투구의 꼴불견이 되고 있다니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왔던 일사불란한 합심일체「고창사람들의 전통적 기질」은 이젠 찾을길이 없다는 것인지 막막한 미로일 따름이다.



오호통재라, 이 고장을 지켜주신 조상신들이시여 오늘날 못나디 못난 후손들을 따끔하게 질책해 주시고 엉망진창으로 되몰리고만 지상낙원 고창을 지켜주시어 부디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다시금 의를 숭상하여 일치단결하는 고창군민 특유의 선비정신을 일깨워 주시옵기 바라오며 이 글을 받칩니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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